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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착한 가격의 럭셔리’, 코치(COACH)의 루 프랭크포트 회장

‘착한(합리적) 가격의 럭셔리(affordable luxury), 럭셔리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luxury)’. 2000년대 럭셔리 업계에 등장한 신조어다. 착한 가격이나 민주주의는 럭셔리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그런데 이 상식을 깬 럭셔리 브랜드가 있다. 고급스러우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 서민도 즐길 수 있는 명품. 이율배반적인 이 공식을 정립한 건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브랜드인 코치다. 상식의 틀을 뒤집은 코치의 공식은 1990년대 말 위기에서 헤쳐 나온 생존 전략이기도 했다. 코치의 대변신을 이끌어온 건 바로 1979년 합류한 루 프랭크포트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다. 뉴욕 맨해튼 34가 집무실에서 그를 만나 경영철학과 코치의 변신 과정을 들어봤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프랭크포트 “난 패션의 ‘ㅍ’자도 몰랐다”

● 코치는 ‘착한 가격의 럭셔리’와 같은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이는 이율배반적인 말이 아닌가.

“럭셔리란 무엇인지부터 생각해 보자. 럭셔리란 결국 소비자가 느끼는 이미지다. 주관적이면서 상대적이다. 상황에 따라 럭셔리의 개념도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우리 주변에 물은 흔하다. 물을 럭셔리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사막에선 다르다. 물이 럭셔리 제품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소비자는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편한 제품을 원한다. 그러면서도 혁신적이면서 가치를 지녀야 한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조화했다. 럭셔리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유럽 명품 브랜드와 똑같은 재료를 쓴다. 매장 서비스도 그들에 뒤지지 않는다. 여기에 적절한 가격 전략을 가미했다.”

● 그렇더라도 소비자가 코치의 전략을 수용해야 의미 있는 게 아닌가.

“물론이다. 세계 20~30대 여성은 어머니 세대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정보를 활용할 줄 안다. 전통이 있다고 명품 브랜드를 무작정 추종하지도 않는다. ‘타깃’ 같은 할인점도 가지만 ‘티파니’ 같은 명품 보석가게에서도 쇼핑한다. 이를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변화에 착안했다. 럭셔리냐, 착하냐(affordable)는 결국 소비자가 판단할 문제다.”

● 90년대 말 위기를 겪었다. 어떻게 극복했나.

“90년대까지만 해도 코치는 지금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코치는 조그만 가죽제품 공방이었을 뿐이다. 디자인도 보수적이고 고전적이었다. 가죽밖에 몰랐다. 다른 제품을 만들 기술도 없었다. 우리의 정수(精髓)는 지키되 변신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먼저 매장 분위기부터 여성적으로 바꿨다. 우리의 품질 기준을 충족하는 아웃소싱 업체도 찾았다. ‘affordable luxury’라는 개념도 이런 노력을 통해 나온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가죽 제조업체에서 종합 액세서리 브랜드로 변신했다.”

● 이번에도 금융위기를 겪었다. 럭셔리 시장에도 변화가 예상되는데.

“빚을 내서라도 사고 싶은 물건을 사는 소비자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앞으로 상당기간은 가격이 세일즈 포인트가 될 것이다. 지난해 7월 경기가 바닥일 때 우리가 ‘포피(Poppy)’라는 편안한 가격대의 생활 브랜드를 도입한 건 이 때문이다.”

● 이번 변신이 실적에 반영되고 있나.

“올 상반기 북미 시장에서 패션업계는 5~10% 정도 성장했다. 반면 코치는 같은 기간 15% 성장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소비자의 관심은 의복에서 액세서리로 옮겨갔다. 앞으로 경기가 부진하면 상대적으로 고가인 의복에 대한 지출은 더 줄어들 것이다. 대신 편안한 가격대의 액세서리 매출은 증가할 것이다.”

● 코치는 시장조사를 꼼꼼히 하기로도 유명한데.

“매년 5만~8만 명을 설문한다. 2010회계연도에도 5만 명을 했다. 대부분 설문은 인터넷을 통해 이루어진다. 갤럽이나 미시간 대학 같은 전문기관에서 쓰는 기법과 같은 수준의 설문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6월에 6000명의 소비자를 설문했다. 그 결과 2년 전보다 소비심리가 나아졌다는 걸 발견했다. 아직도 45% 응답자는 미국 경기가 앞으로 더 나빠질 것으로 보고 있으나 2년 전엔 이 비율이 87%였다.”

● 코치는 북미에서만 121개의 아웃렛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아웃렛 매장이 럭셔리 브랜드 이미지를 깎아내리지는 않을까.

“그렇지 않다. 이 역시 소비자 설문을 통해 확인한 것이다. 제값을 주고 쇼핑을 하는 고객과 할인점을 찾는 고객의 80%는 겹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다른 소비자다. 아웃렛과 백화점의 상품도 완전히 다르다. 더욱이 정찰판매점에선 결코 할인하지 않는다. 이게 다른 럭셔리 브랜드와 다른 점이다.”

● 아니 정찰판매점과 아웃렛 매장의 물건이 다르다는 것인가.

“아웃렛 매장 제품은 철 지난 상품이라고 보면 된다. 아웃렛을 찾는 고객은 섬유 재질보다는 튼튼한 가죽 재질의 제품을 선호한다. 올해 유행할 제품보다는 오래 쓸 수 있는 걸 원하는 거다. 남이 어떻게 보느냐보다 자신에게 필요한 제품을 찾는 실용주의자다.”

● 매출의 20%는 일본에서 나온다. 일본 시장에서 성공한 비결은.

“첫째 일본 소비자가 유럽 럭셔리 브랜드의 대체 상품을 절실히 원했다. 둘째는 가격 경쟁력이 있었다. 셋째는 혁신 덕분이다. 우리는 30일마다 매장에 새로운 제품(매월 입고되는 신규 스타일 수 30~50개)을 선보이고 있다. 3개월 이상 제품을 바꿔주지 않으면 고객은 이를 알아채고 다시 찾지 않는다. 끊임없이 새로운 제품을 내놓았기 때문에 고객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 국가별로 소비자의 기호에 차이가 있나.

“몇 가지 차이가 있다. 한국 소비자는 ‘크로스 보디’ 백(옆으로 메는 백)이나 끈이 긴 백에 관심이 많다. 일본이나 미국에서 코치 브랜드는 이미 성숙단계다. 그러나 한국 시장에선 진입단계다. 그래서 코치의 전통을 소비자에게 각인하는 게 더 절실하다. 한국에서 가죽제품을 주로 선보이고 있는 건 이 때문이다.”

● 학창시절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았다고 들었다. 코치 같은 패션회사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솔직히 학생 땐 패션에 관심이 없었다. 아내도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뉴욕대(NYU) 잡지를 편집하고 있다. 나도 공무원으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그런데 나는 결과를 중시하는 성격이다. 그렇다 보니 정부에선 성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호한 때가 많았다. 성과에 대한 보상도 적었다. 그래서 민간 부문에서 일해 보면 어떨까 늘 생각했다. 코치에 합류하기 전 회사에 대해 알아보기도 했다. 당시 난 맨해튼에 살았는데 한 바이어에게 기자를 사칭하고 전화를 했다. 코치에 대해 조사하고 있는데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코치는 작은 브랜드지만 매니어 집단이 있는 회사’라고 귀띔해 줬다.”

● 패션도 몰랐다면서 어떻게 코치의 CEO가 됐나.

“밖에서 왔다는 게 어떤 면에선 장점도 됐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입장에 설 수 있었다. 감각과 느낌을 중시하는 매직과 논리에 기반한 지식을 조화시킬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다.”

● 코치에는 어떤 유형의 경영자가 필요한가.

“내 후계자는 ‘제너럴 리더’가 됐으면 한다. 패션 감각이 있으면서도 다양한 그룹의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다. 회사의 덩치가 커질수록 고객과의 접점은 멀어질 수 있다. 이를 극복하자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덩치가 커져도 조직이 민첩하게 움직이도록 하려면 조직원 모두가 목표와 비전을 공유해야 하고 권한을 가진 사람에게 적절한 견제 장치를 둬야 한다.”

“ 숫자엔 강했다. 감각의 패션 시장 … 데이터로 뚫었다”

매출 600만 달러서 36억 달러로 … 프랭크포트의 리더십


루 프랭크포트 회장은 가내수공업에 불과했던 코치를 미국을 대표하는 패션 아이콘으로 성장시킨 사람이다. 그가 1979년 신규사업개발 담당 부사장으로 코치에 합류했을 때 코치의 연 매출액은 600만 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과감한 혁신으로 30여 년 만에 코치의 매출액을 600배나 끌어올렸다. 올해 6월 기준 코치의 연매출은 36억 달러다.

그는 코치 안에서도 ‘숫자 박사(numbers man)’로 통한다. 매출액에서부터 수익률·점포수·1인당 생산성과 같은 숫자를 훤히 꿰고 있다. 직감이나 통찰보다는 객관적인 숫자를 더 신뢰한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도 소비자 설문과 이를 분석한 자료에 많이 의존한다. 가죽제품으로 뜬 코치가 액세서리와 보석까지 아우르는 럭셔리 패션 아이콘으로 성장한 것도 그의 숫자 경영 덕분이었다. 냉정하고도 철저한 시장조사가 뒷받침됐기 때문에 새 시장을 과감하게 개척할 수 있었다.

감각과 직관이 지배하기 쉬운 패션업계에서 그가 숫자 경영을 펼친 건 아이러니하게도 아웃사이더였기 때문이다. 1979년 그가 코치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만 해도 그는 패션에는 문외한이었다. 뉴욕 브롱스 토박이로 1960년대 헌터 시립대에 다닐 때는 반전운동에 발벗고 나서기도 했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경영학석사(MBA)를 마친 뒤엔 뉴욕시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0년 동안 육아·보건 행정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쌓았지만 공직사회는 그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성과에 대한 보상이 약했기 때문이다. 그가 합류할 당시 코치는 성장의 한계에 직면한 상태였다. 맨해튼 가먼트디스트릭트의 작은 공방에서 럭셔리 가죽제품 브랜드로 덩치는 커졌지만 그 안에 든 소프트웨어는 공방의 틀을 벗지 못했다.

1985년 코치 창업자는 자식들이 아무도 가업을 물려받으려 하지 않자 3000만 달러를 받고 미국 식품제조업체 ‘사라 리’에 코치를 팔았다. 코치를 인수한 사라 리는 프랭크포트를 사장으로 발탁했다. 날개를 단 그는 코치의 덩치에 걸맞은 새 옷을 입혔다. 제품의 질에 대한 창립자의 고집은 살리되 생산방식은 현실에 맞게 바꿨다. 뉴욕에서 수작업으로 만들던 제품을 세계 각국으로 아웃소싱한 것이다. 미국 북동부와 중부에만 국한됐던 판매망도 일본을 시작으로 전 세계로 확대했다.

패션산업의 주류가 의복에서 액세서리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뒤 액세서리 비중도 높였다.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프랭크포트의 전략은 시장 변화와 딱 맞아떨어졌다. 금융위기의 와중에도 코치가 큰 타격을 입지 않은 건 액세서리 부문의 성장 덕분이었다.

그 덕에 프랭크포트는 경제전문 잡지 배론이 뽑은 30인의 ‘가장 존경받는 최고경영자(CEO)’에 2005~2008년 4년 연속 뽑혔다. 인스티튜셔널 인베스트지는 그를 2004~2008년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CEO’로 선정했다.

코치 어떻게 성장했나

소가죽을 여성용 핸드백으로


1950년대까지만 해도 소가죽으로 여성용 핸드백을 만든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두껍고 질겼기 때문이다. 핸드백은 딱딱한 보드에 부드럽고 얇은 양가죽 같은 걸 덧씌워 만들었다. 이 공식을 깨뜨린 건 미국 뉴욕 맨해튼의 패션거리 가먼트디스트릭트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무명의 공방이었다. 41년 뉴욕 토박이 가죽 세공업자 6명이 차린 이곳은 50년대까지 지갑·서류가방 따위를 만드는 평범한 공방이었다. 창업자 마일스와 릴리언 칸 부부는 가죽 처리에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 마일스 칸은 60년 소가죽을 처리하는 신기술을 개발했다. 부드러우면서도 염색이 잘 들게 하는 기술이었다. ‘코치’라는 브랜드로 소가죽 핸드백을 처음 선보인 순간이었다.

직장 여성 늘면서 큰 인기

전후 경제 부흥기였던 미국에선 직장생활을 하는 여성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쉽게 찢어지거나 흠집이 나는 다른 회사 제품과 달리 코치 소가죽 핸드백은 질기면서도 부드러워 직장 여성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칸이 고집한 고전적인 유럽식 디자인은 신세대 미국인에게 맞지 않았다. 고심하던 칸은 당시 샛별처럼 뜨던 보니 캐신이란 디자이너를 영입했다. 훗날 미국 기성복 디자이너 1세대로 이름을 날린 바로 그였다. 캐신은 74년 코치를 떠나기 전까지 뉴욕 동네 브랜드였던 코치를 럭셔리 브랜드로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코치 백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작은 동전지갑과 가방을 잠그는 데 쓰는 비녀 모양의 금속 단추는 그가 고안한 것이다.

우편 판매와 직영점 ‘실험’

70년대와 80년대 초 코치는 두 가지 실험에 나섰다. 우편 판매와 전문 직영점이었다. 실험은 성공이었다. 코치 백은 없어서 못 팔 지경이 됐다. 심지어 물량을 배급해야 했다. 성공에 고무된 칸은 모든 공정을 수작업으로 하는 전통 생산방식을 고집했다. 생산 본거지도 뉴욕을 고수했다. 그러나 이미 뉴욕은 수작업으로 핸드백을 만들기에 너무 비싼 도시가 돼 있었다. 명성은 여전했지만 코치의 수익성은 날로 악화했다. 돌파구가 필요하던 차에 79년 뉴욕시 공무원 출신 루 프랭크포트가 영업개발부 부사장으로 합류했다. 칸과 달리 프랭크포트는 과감한 아웃소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핸드백에서 액세서리로 제품을 다양화하고 판매 거점도 늘렸다.

가죽 이외 제품도 선보여

88년 처음으로 비(非)가죽제품을 선보였다. 한 장에 60달러짜리 실크 스카프였다. 그해 해외진출에도 나섰다. 뉴욕 매출의 상당부분을 아시아 관광객이 올려줬다는 데 착안했다. 영국·일본에 매장을 열었다. 가죽을 고집해 온 코치가 미국을 대표하는 종합 럭셔리 브랜드로 거듭난 건 이때부터다. 97~98년엔 위기를 맞았다. 아시아 금융위기와 가죽제품에 식상해진 유행의 변화 때문이었다. 코치는 사업을 축소하는 대신 넓히는 역발상으로 위기에 대응했다. 럭셔리 이미지는 살리되 유럽 경쟁제품에 비해 가격을 15~20% 확 낮췄다. 젊은 세대를 겨냥해 섬유 재질의 밝은 색상을 과감하게 도입했다. 2000년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됐다.


j 칵테일 >> 첫 아이디어는 야구 글러브에서

코치의 첫 핸드백은 야구 글러브에서 영감을 얻었다. 코치는 야구 글러브의 독특한 문양에 강약의 변화를 주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다듬어 첫 핸드백을 만들었다. 이후 혁신적인 가죽 처리 기법 등으로 다양한 형태의 가죽 제품이 나오고 있지만 야구 글러브 가죽 소재는 여전히 코치의 전통으로 남아 있다. 코치와 가죽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하지만 현재 코치는 가죽 이외에 다양한 소재를 사용해 제품을 만들고 있다. 또 핸드백뿐만 아니라 액세서리·서류가방·여행가방·장갑·보석류 등도 생산하고 있다. 마차 그림이 그려진 코치 로고는 1960년대에 처음 소개됐다. ‘Coach’는 영어로 말과 대형 마차를 뜻한다. 이 로고로부터 ‘코치’라는 이름이 파생됐다. 코치 제품은 100만원 이상의 고가품부터 일반인이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제품까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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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