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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세상사 편력] 내 삶을 강물에 떠맡기지 마라

“모든 상급 학교의 사명은 무엇인가. 인간을 기계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한 수단은 어떤 것인가. 지쳐서 맥 풀리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모범이 되는 것은 누군가. 학자들이다. 덮어놓고 공부하는 것을 가르치니까.”

독일 철학자 니체가 『우상의 황혼』에서 한 말입니다. 19세기 독일 고등교육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지만, 21세기를 여는 시점에서의 우리 교육을 두고 한 말처럼 폐부를 찌릅니다.

미국 심리학자 프롬은 또 『소유냐 삶이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학교는 늘 학생들을 인간 정신의 가장 높은 위업에 이르게 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학교는 반대로 종합적인 지식상자를 생산하는 공장일 뿐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대학이 이런 환상을 만들어내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고 있다.” 20세기 미국 대학에 대한 조소지만 오늘 우리 대학들이 더 제 발 저릴 것 같습니다.

여기에 한 지인이 혀를 차며 들려준 얘기가 겹칩니다. 고교생 딸이 선언하더랍니다. “대학에만 들어가면 공부 끝이니까 딴소리하지 말아요.” 지인의 딸은 대학 가서 공부는 하지 않을 수 있어도, 불행하게도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겁니다.

니체가 말하는 ‘우상’이란 지금까지 진리라고 여겨져 온, 그래서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믿는, 그러나 더 이상 옳지 않기에 뒤집혀야 할 가치들을 일컫습니다. 프롬의 ‘환상’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의 오늘날 대한민국적 발현이 바로 지인 딸내미의 선언인 거죠.

이제 그런 우상을 부술 때가 됐다고 봅니다. 대학 들어가느라 지치고 맥 풀려서 정작 학문을 시작해야 할 대학에서는 의욕을 잃어버리는 웃지 못할 현실과는 이제 결별해야 할 때가 됐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교육 시장만 배불려 주고 학생들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갈 길을 못 찾으며 부모들은 대책 없이 황량한 노후로 내몰리는 블랙 코미디를 끝내야 한다는 거지요.

그러던 차에 반가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가장 들어가고 싶어 하는 직장인 삼성에서 고졸자를 우대하기로 했다지요. “고학력이 아니더라도 사회에서 톱 클래스로 대접받을 수 있도록 삼성이 분위기를 만들어 가겠다”고 말이지요. 말만 들어도 반갑고 고마운 일입니다. 기업이 나서지 않으면 말짱 헛일이니까요. 우상을 파괴하자, ‘대학 졸업장이 스펙 중 하나 말고는 다른 게 아닌 현실에서 벗어나자고 백날 떠들어봐야 황야에서 홀로 외치는 소리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삼성 같은 초일류 기업에서 앞장서 줘야만 다른 많은 기업으로 확산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그것은 삼성 스스로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대학이라는 공장에서 생산된 판박이 지식상자들로만 충원해서는 미래가 없는 까닭입니다. 삼성 제품이 무엇이든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지만, 삼성이 여태껏 아이폰이나 윈도, 워크맨처럼 시대를 앞서는 창조적 제품을 만들어 본 적이 없다는 사실도 다른 원인이 있는 게 아니지요. 삼성의 이번 약속이 상생을 외치는 정부의 압력에 등 떠밀려 나온 허울 좋은 구두선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 젊은이들이 화답할 차례입니다. 무조건 대학에 가지 말란 말이 아닙니다.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대학과 학과를 찾으란 말입니다.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다면 대학 밖에서 찾는 게 낫습니다. 무슨 분야건 실력만 있다면 가방끈이 길지 않아도 톱 클래스로 대접받을 수 있는 날이 분명 옵니다. 믿기지 않을지 몰라도 그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로마제국의 지도층 가운데 그리스 아테네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최고학부에서 공부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지도자에게 요구된 덕목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고상한 이론이 아니라 현실과 맞닥뜨리며 배운 구체적 체험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로마의 명문가 자제들은 군단의 하위 장교나 말단 행정직 업무를 수행하면서 경험을 쌓았습니다.

로마시대만 그런 게 아닙니다. 오늘날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 그리고 트위터를 만든 비즈 스톤 같은 이들도 대학을 때려치우고 나와서 신화를 창조하지 않았습니까. 남들 대학 가니까 나도 가고, 유망 학과라니까 나도 가야 안심이라는 식으로는 얻을 것도 이룰 것도 없습니다. 로마시대 철학자 세네카는 그런 이들을 일컬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강에서 표류하는 사람과 같다. 자신의 진로를 스스로 정하는 게 아니라 강물에 떠맡긴다.” 물살을 거스를 때는 거스르고, 강을 건너야 할 때는 과감히 건너세요. 남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의 삶입니다.

이훈범 중앙일보 j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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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