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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Novel] 이문열 연재소설 ‘리투아니아 여인’ 2-5

일러스트: 백두리 baekduri@naver.com
“누구야?”

그 남자가 가고 둘만 남게 되자 나는 혜련에게 그것부터 물어보았다. 혜련이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대학원에서 만난 선배예요. 작곡 쪽의.”

“작곡? 저 큰 키에 그 덩치하고는 어째 안 어울리네. 클래식이야?”

“아녜요. 팝 쪽, 그러나 대중가요는 아니고-.”

“그럼, 그쪽도 무슨 무대음악 같은 거야?”

“그것도 무대음악이라고 해야 하나? 요즘 창작 뮤지컬 하나 맡아 작곡 중이래요.”

“뮤지컬? 더구나 기존 음악 편집 정도가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통으로 다 작곡해야 하는 창작 뮤지컬이라고?”

내가 좀 낯설다는 기분을 느끼며 그렇게 반문했다. 한참 연극을 배울 때는 뮤지컬이라면 할리우드 영화의 한 장르처럼 여겨왔고, 80년대가 다 돼 가는 그때까지도 무대공연으로 직접 본 것은 달랑 <아가씨와 건달들> 한 편뿐인 지방 출신의 아마추어 연출가로서는 당연한 반응인지도 몰랐다. 혜련이 무엇 때문인지 항변하듯 말했다.

일러스트: 백두리 baekduri@naver.com
“창작 뮤지컬이 왜요? 우리라고 언제까지나 번역으로 혀가 꼬이고, 노랑머리 분장으로 어른들 학예회같이 되기 일쑤인 수입 뮤지컬만 해야 하나요? 이제쯤은 우리도 한번 뮤지컬에 도전해볼 만하다고 봐요. 아니, 어쩌면 우리나라에도 곧 뮤지컬 전성기가 오고, 우리 성대와 몸에 맞는 창작 뮤지컬이 공연무대를 휩쓰는 날이 올 수도 있어요. 런던의 스칼라나 뉴욕의 브로드웨이처럼 말이에요. 그리고 그런 면에서 보면 오히려 그 사람이 앞서가고 있는지도 모르죠.”

그러자 그 무렵 들어 신문이나 방송에서 본 <레 미제라블>이나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캣츠> 같은 대작들의 화려한 무대 컷과 포스터 사진이 뒤죽박죽 한꺼번에 떠올랐으나, 뮤지컬을 바라보는 내 선입견을 쉽게 바꿔놓지는 못했다. 다만 어떤 대목에서는 항변하는 듯한 어조 못지않게 이글거리는 혜련의 눈빛에서 받게 되는 심상찮은 예감이 의아할 뿐이었다.

나는 그게 무엇 때문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그녀의 말과 함께 그 말을 할 때의 표정들을 되떠올려 보았다. 짧은 순간이지만 그녀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가 보다 깊고 가라앉은 빛으로 이글거리던 순간이 포착되었다. 바로 그녀가 조금 전 남자를 ‘그 사람’이라고 부를 때였다. 나는 까닭 모르게 후끈 달아오르는 기분을 억누르며 앞뒤 없이 불쑥 물었다.

“좀 전 그 친구 정말로 누구야? 이제 보니 여느 선후배 사이 같지 않은데?”

“제가 너무 쉽게 들켰나? 좋아하는 사이예요. 어쩌면 그와 결혼하게 될지 몰라요.”

이번에도 혜련은 별로 머뭇거리는 기색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 말에 무슨 들어서는 안 될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가슴이 철렁하고 눈앞이 아뜩했으나 이번에도 그 까닭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그 까닭을 알게 되는 게 두려워져 나는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결혼이라…. 우리 금발의 제니가 벌써 그렇게 되었나?”

“저도 벌써 스물일곱이에요. 예전 같으면 노처녀라도 한참 노처녀라고요.”

혜련이 코카서스 인종의 용모적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얼굴에 영 어울리지 않는 우리식 말투로 그렇게 대답하고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었다.

“저녁 어떻게 하시겠어요?”

“왠지 생각이 없네. 멕시칸 샐러드로 생맥주나 몇 잔 하고 보지.”

나는 저녁 생각이 없다기보다는 갑자기 술 생각이 간절해져 그렇게 대꾸했다.

“그렇게 하죠. 저도 점심을 늦게 먹었어요.”

혜련이 그렇게 따라주어 생각보다 빨리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생맥주가 나올 무렵부터 화제는 한동안 우리가 함께할 연극을 중심으로 이어졌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렇게 이끌어갔다는 편이 옳았다.

“그래, 무슨 일로 이번 음악 연출 그리 빨리 마음을 굳히게 됐어? 어제 준 희곡은 다 읽은 거야?”

내가 그렇게 묻자 혜련이 제법 감상적인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그보다는 제가 가지고 있던 비디오부터 다시 살펴보았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뿌리치기 어려운 끌림을 느낀 까닭은 옛적에 세일럼을 찾아갔던 추억 때문이었을 거예요.”

“세일럼에 가보았다고? 그게 어디 있는데? 그리고 거기는 어떤 데야?”

“매사추세츠에 있는데, 온통 마녀재판을 관광자원으로 해서 먹고사는 동네죠. 마녀 박물관도 있고, 매일 그때 일을 재연하는 거리 연극이 벌어지고….”

“매일 거리 연극이 벌어진다고?”

“10년 전 제가 놀러 갔을 때는 그랬어요. 점심을 먹은 지 얼마 안 됐으니 오후 두 시쯤 됐을 거예요. 어떤 골목 모퉁이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 카드 몇 장을 고르는데,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나가 보니 17세기 복장을 한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던 한 예쁘장한 여자가 신들린 듯한 표정으로 질러대는 소리였어요. 아마도 하녀 아비게일이 재판소로 호송되고 있는 장면이었을 거예요. 그들이 걸친 고색창연한 의상이나 그 여배우의 창백하면서도 음영 깊은 분장으로도 짐작은 했지만, 무엇보다도 관광객인 듯한 사람들이 떼를 지어 따라가면서 구경하는 것을 보고 저도 그게 거리에서 벌이는 연극인 줄 알았죠. 나중에 들으니, 재판소까지 따라간 관광객들은 배심 판결에까지 참여한다고 하더군요. 그때는 아주 인상적이었지만 그 뒤 오래 잊고 지났는데, 어제 희곡을 받고 읽어가다 보니 문득 그 일이 떠올랐어요. 그리고 <크루서블>이라면 뭔가 내가 거들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들어보니 나도 독특한 느낌이 드네. 그 밖에 거기서 더 본 것은 없어?”

“너대니얼 호손요. <주홍글씨>를 쓴 너대니얼 호손의 집이 그 도시에 있었는데, 그때는 세일럼의 마녀재판과는 별개의 관광거리로만 보았어요. 특히 <일곱 개의 박공(<7254><6831>)이 있는 집>이란 소설의 모델이 된 집으로만. 그런데 어제 문득 세일럼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이번 작품에 활용할 만한 호손의 작품들을 몇 편 더 찾아냈어요.”

그러자 나도 기억나는 게 있었다.

“맞아. 호손의 조상 중에 세일럼의 마녀재판에 참여해 그 참혹한 판결을 내리는 데 거든 이가 있었다지 아마. 그래서 호손은 자신의 성을 쓸 때 없던 철자를 하나 보태 조상들의 성과 차별을 주었다고 했고…. 유전자에 착색된 그때의 상처가 그의 작품에 반영되어 있다는 소리도 들은 것 같아.”

그렇게 맞장구를 쳐주자 혜련이 한참이나 그 사례를 들었다. <주홍글씨>나 <젊은 굿맨 브라운> 같은 작품에 드러나 있는 것들인데, 하룻밤의 천착으로 보기 어려운 깊이를 느끼게 했다.

“게다가 호손이 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대개가 세일럼의 마녀재판이 있던 시절이라고 들었어요. 아마도 배경의 음색을 정하는데도 그의 작품을 영화화한 것들이 도움이 될 거예요.”

혜련이 논의에 한 단락을 짓듯 그렇게 말하고 잠시 자리를 뜬 것은 다섯 번째 생맥주 잔을 받았을 때였다. 날은 이미 저물었고, 식당 안은 어느새 술꾼들로 왁자지껄했다. 아무래도 저녁을 먹지 않고 마신 술이라 그런지 나도 슬며시 취해왔다. 다섯 번째 생맥주 잔을 비우며 풀려오는 눈길로 술집 안을 돌아보는데, 저만치 입구 쪽에 있는 전화 부스 안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 혜련이 보였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구나, 싶다가 그게 바로 얼마 전에 본 그 키 큰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다시 가슴에 후끈한 기운이 솟구치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혜련을 알게 된 뒤로 나는 한번도 그녀를 여성으로 의식해본 적은 없었다. 나이 차이는 열 살도 나지 않지만 <금발의 제니>로서의 인상이 너무 강하게 남은 데다, 나중에 성숙해 만나서도 그 계기가 연극이 되어서 그런지 그녀가 이성이란 느낌은 별로 없었다. 거기다가 이성에 대해서는 특별히 이국 정취를 선망하지 않는 내 취향도 우리 사이에 남녀 간의 어색함이 끼어드는 것을 막아주었다. 서울에 와서 서른다섯의 노총각과 스물일곱의 성숙한 여성으로 다시 만난 뒤에도 이성 간의 특별한 감정의 개입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70년대 말 초기 해외 진출 붐이 일고 난 뒤 <백마 타고 온 또또>란 별명으로 놀림 받던 사람들이 있었다. 원래는 어떤 산문집 제목이었는데, 어원은 하도 아는 척 나서는 바람에 똑똑이란 별명을 가졌던 사람이 한동안 외국 바람을 쐬고 난 뒤 귀국해 백인 여자와 잔 것을 자랑하다가 얻은 별명이었다. 백인 여자는 백마가 되고 똑똑이는 기역자 받침이 날아가 <백마 타고 온 또또>가 되고 말았다. 그것도 속 깊은 이국 정취의 경험으로 여겨 한때는 부러워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80년대 말 그때만 해도 그 별명은 그저 우스갯소리거나 놀림거리로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얼큰히 취해가던 나에게는 달랐다. 전화 부스 안에서 웃으며 통화하는 혜련을 보며 느닷없이 그 별명을 떠올린 나는 그 전화를 받고 있을 혜련의 남자에게 갑작스러운 적의를 느꼈다. <백마 타고 온 또또>에게 느끼던 경멸이나 조롱의 감정과는 전혀 다른 세차고도 속 깊이서 우러나는 적의였다. 그러고 보니 혜련에게서 그와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철렁하고 눈앞이 아뜩했던 까닭도 알 듯했다. 나 역시 너를 여자로도 의식하고 있었구나 - 거기서 내 감정은 잠시 두서없이 헝클어졌다. 그러나 오래갈 혼란은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잠시 후 돌아온 혜련이 밝게 웃으며 그렇게 물어왔을 때는 어느 정도 격한 감정을 추스른 뒤였다.

“무슨 전화를 저리 길게 할까 - 그런 생각….”

농담처럼 그렇게 받아놓고 취기를 과장하며 덧붙였다.

“그리고 - 그 키 큰 몽골리안이 무슨 재주로 우리 금발의 제니를 사로잡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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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