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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

9월 28일은 서울 수복 60주년이었다. 또한 손양원(1902~50·사진) 목사가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손 목사는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한센병 환자들의 수용소인 소록도 애양원에 부임한 뒤 그들을 위한 구호사업에 일생을 바쳤다. 스물네 살 때 그는 부산 감만동 한센병자 집단치료소인 상애원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한센병자들을 처음 접하게 됐다. 그의 설교에 감명받은 환우들이 손 목사가 신학교에 들어가자 십시일반 돈을 모아 학비를 댔고, 이렇게 맺어진 인연이 그를 애양원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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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목사가 부임할 때만 해도 애양원은 직원구역과 환자구역이 철저히 분리돼 있었다. 심지어 예배당까지도 목회자 자리와 환우들 자리가 유리벽으로 막혀 있었고 창문을 통해 말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손 목사는 과감히 이런 벽들을 허물었다. 감염 위험과 악취를 개의치 않고 수시로 환자 숙소를 드나들었다. 간호사들도 들어가길 꺼리던 중환자실에 찾아가 환자들 손을 잡아줬다. 밤새 고통으로 울부짖는 환자들을 위해 직접 자신의 입으로 고름을 빼내고 기도해줬다.

40년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구금돼 모진 고문을 겪었다. 끝까지 참배를 거부하던 그는 광복 후 다시 애양원으로 향했다. 많은 교회가 모셔가겠다고 했지만 “환우들을 버릴 수 없다”며 소록도행을 자원했다. 48년 여수ㆍ순천사건 때는 폭도들에게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었다. 하지만 그는 곧 가해자 구명운동에 나섰다. 처형 직전 주동자인 안재선을 살려내고 오히려 원수를 양자로 삼았다. 안재선은 이후 이름도 손재선으로 바꾸고 손 목사를 힘껏 보좌했다. 훗날 손 목사 순교 당시 상주 역할을 한 자도 그였다.

6·25전쟁이 터지자 그는 피란 권유를 마다하고 행동이 부자유스러운 나환자들과 함께하겠다며 끝까지 교회를 지키다 9월 28일 공산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그의 생애는 ‘사랑의 원자탄’이란 이름의 책과 영화로 알려져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손 목사의 삶을 존경하는 사람이 많은 까닭이다. 백범 김구 선생도 “공산당을 진정 이긴 사람은 손양원 목사다. 이 땅의 정치가들에게도 손 목사와 같은 아량과 포용성이 있다면 공산주의도 이길 수 있고 남북통일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손 목사의 일생을 돌이켜보면서 우리 정치의 현실을 떠올렸다. 죽기살기로 싸우는 정치판에 사랑의 원자탄을 터뜨리는 방법은 없을까. 불신의 유리벽을 과감히 허물고 서로의 손을 맞잡는 것은 정녕 불가능한 것일까.

최근 친이-친박 교차회동이 화제다. 속내야 어떻든, 예비 대선행보든 아니든, 벽을 허물려는 모습은 국민들 보기에 나쁘지 않다. 민주당 전당대회가 오늘이다. 후보들의 난타전과 네거티브 공세가 도를 넘었다 싶을 정도로 심했다. 감정의 반목이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우려도 나온다. 누가 대표가 되든 먼저 손을 내밀고 사랑의 원자탄을 터뜨렸으면 좋겠다. 먼저 허리를 숙였으면 좋겠다. 잘나가는 집안도 아닌데 집안싸움까지 하면 누군들 눈길이나 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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