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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는다, 다만 진화할 뿐이다”

6·2 지방선거는 지방 정부의 권력교체를 가져왔다. 하지만 이광재(45·사진) 강원지사는 7월 1일 도지사 취임과 동시에 직무가 정지됐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재판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 지사는 곧바로 헌법 소원을 제기했고 헌법재판소는 지난달 2일 관련 조항이 무죄추정의 원칙에 위배된다며 헌법불합치 판정을 내렸다. 직무정지의 족쇄에서 풀려난 지 한 달, 중앙SUNDAY가 이 지사를 만났다.

업무 복귀 한 달 , 이광재 강원도지사

인터뷰는 9월의 마지막 날 오후 강원도청 지사 집무실에서 이뤄졌다. 1시간45분간 이어진 인터뷰에서 그는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와 강원도 발전 구상, 3일 열리는 민주당 전당대회 등에 대한 생각을 털어놨다. 청색 와이셔츠에 밝은 노란색 넥타이 차림의 이 지사는 시종 웃음 띤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백척간두에서도 진일보’가 내 철학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 활동이 활발하다.
“겨울올림픽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을 많이 해봤다. 대학 다닐 땐 88 서울올림픽 반대데모도 많이 했었는데(웃음), 그때 서울 거리가 많이 깨끗해졌다. 88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을 통해 국민의 자존심이 높아지고 국민적 역량도 결집됐다. 최근엔 김연아 선수가 또 그걸 보여줬다. 평창 올림픽을 치르게 되면 30년 만에 국가적으로 다시 한번 업그레이드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서울에도 자주 올라오는 걸로 알고 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간다. 주로 정부와 기업 관계자들을 만난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인 이건희 회장도 만나뵙고. 겨울 올림픽은 국가적 과제라는 측면이 강하다. 수출 면에서나 관광산업 측면에서도 부수효과가 크다. 10월엔 멕시코, 11월엔 중국 등 해외로 나가 유치활동을 할 거다. 10월엔 이건희 회장과 조양호 회장도 같이 간다.”

-유치 가능성은 얼마나 되나.
“한국 속담에 삼세 번은 된다지 않나(웃음). 잘될 것 같다는 느낌이 있다. 강원도를 아시아의 스위스로 만드는 게 목표다.”

-지역발전이 상대적으로 더딘 지역인데 ‘강원도의 힘’을 어떻게 현실화할 건가.
“역시 자연을 최대한 활용해야 할 거다. 관광은 기본이고 바이오산업에서도 새 지평을 열어 보려고 한다. 서울대 그린바이오연구단지가 평창에 오는데 서울대 본교 면적의 1.5배다. 또 2박3일 리조트에 들어와 편안하게 건강검진하려는 중국인 관광객이 최근 크게 늘고 있다. 강원도의 고급 리조트를 십분 활용하면 승산이 있다.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 한 아토피 치유센터도 야심차게 준비 중이다. 강원도 전체 땅값이 공시지가로 75조원인데 국·공유지가 7조5000억원어치나 된다. 이걸 기업유치에 최대한 활용하려고 한다. 토지기획단을 만들어 기업들에 확실한 특혜를 줄 생각이다.”

강원도 오는 기업에 확실한 특혜 주겠다
강원도 발전에 대한 그의 구상은 이어졌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명상과 치유의 숲을 마련 중이다. 강원도엔 산소길이 수없이 많다. 산소가 서울보다 3% 많다. 자고 일어나면 훨씬 개운하다. 골프 치듯이 5~8분 간격으로 걷게 하면 앞뒤 아무도 없이 700m 고지를 따라 50㎞씩 걸을 수 있다. 문성근 선배가 숨겨진 길 찾기 단장 시켜달라고 e-메일을 보내왔더라. 또 숲길 사이사이에 허브나 라벤다를 심고 거기에서 물질을 추출해 비누 등 입욕제를 만들면 부가가치가 상당하다. 커피잔만 한 비누 2장에 6만원이나 한다. 허브를 채취하고, 이걸 수제비누로 만드는 것 모두 노동력이 필요하니 일자리도 창출하고 일석이조인 셈이다.”

-이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나.
“얘기를 많이 듣는다. 마을회관에서도 많이 자고. 도지사 선거 후 어떻게 이기게 됐을까 생각을 많이 했는데 ‘아, 정치 하는 사람들은 자기 얘기를 너무 많이 하는구나. 내가 성공한 것은 리스닝(듣기)이었구나’ 싶었다. 나는 현장에 많이 가본다. 또 일주일에 책을 10권씩 사서 본다. 사람들이 절실하게 사는 얘기를 듣고 책을 읽다 보면 조합하는 능력이 생긴다. 현장 얘기를 들으면 답이 나온다.”

-진보 입장에서 보수를 비판해왔는데 도지사가 된 뒤 시장친화적 활동이 활발하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는다. 결국엔 그 당시 많은 사람의 합의수준이 높은 걸 합리적 프로세스를 통해 선택하면서 진화하는 것이다. 그걸 해내는 집단은 성공할 거고, 그렇지 않고 자기 생각에 얽매여 있으면 안 되는 거고. 절대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지사도 복지를 강조해오고 있지 않나.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 내 생각과 같지 않다는 점이다. 다르다는 것, 그걸 어떻게 공존해 나가느냐가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치는 분명히 있다. 나는 교육을 최대의 복지로 생각한다. 강원도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영어와 중국어 기초회화가 가능하도록 할 거다. 지역구에서 해보니까 실현 가능성이 충분하다. 진보·보수라는 딱딱한 이론은 큰 의미가 없다. 결국은 현실의 문제를 어떻게 타개해 나가느냐, 방법과 기술의 문제일 뿐이다.”

일자리·교육·복지에서 진보의 모델 만들 것
강원도 얘기만 했는데도 1시간이 훌쩍 지났다. 정치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인간 이광재’의 정체성은 뭔가.
“나는 진화하는 사람이다. ‘진화하는 조직과 인간이 되자’가 내 좌우명이다. 사람은 늘 달라진다. 담배 피우는 사람이 오늘은 흡연가지만 금연하면 더 이상 흡연가가 아니다.”

-강원도지사실에서 보는 여의도는 어떤가.
“너무 멀게 느껴지지(웃음).”

-최근 정치를 보면 어떤 느낌이 드나.
“도지사로 오길 잘했구나(웃음). 청와대에 있을 때는 뭔가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국회에 가니까 생산성이 너무 떨어지더라.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지역구에서 반드시 모델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해답은 일자리·교육·복지라고 봤다. 식당·서당·경로당 등 3당 정책이 그것이다. 이 분야에서 확실한 진보의 모델을 만드는 게 꿈이다.”

-그동안 시련이 많았다.
“파란만장했지.”

-정치를 시작한 뒤 많은 역경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떨치고 일어섰다. 원동력은 뭔가.
“물처럼 사는 거다. 시련이 와도, 구덩이가 다 차야 또 떠나는 법이다. 어려울 때 덩샤오핑 책을 많이 봤는데, 이번에도 직무정지 때 본 게 다 지나간다라는 책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역경을 이겨내고 중국 최고의 석학이 된 분이 99세에 쓴 책이다. 시련을 딛고 일어나는 자가 ‘따거’(大兄·지도자)가 된다.”

-대법원 판결 등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인생살이는 파도 같은 거다. 파도가 지나가면 또 다른 파도가 밀려온다. 항상 편안한 길을 선택하려 하지 않는 한 파도는 계속 오는 거다. 그때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몸에 힘을 주지 않고 떠있어야 한다.”

-재판이 도정을 이끌어가는 데 심리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나.
“그게 내 마음을 심란하게 하진 않는다. 그런 부분이 나를 흔들리게 할 정도로 내가 약하진 않다. 백척간두에서도 진일보해서 살아간다는 게 기본 철학이다. 나 자신에 대한 자신이 없었으면 국회의원을 그만두고 아무도 당선 못될 거라던 선거에 도전하지도 않았다.”

-무슨 마음으로 지사에 도전했나.
“강원도를 사랑하니까. 사랑하면 모든 걸 거는 거다. 내가 감옥 갔을 때 수십만 명의 강원도민이 (탄원)서명을 해줬다. 은혜를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직 대통령은 그 자체가 질서, 존중돼야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었는데.
“만든 건 아니고 도와 드린 거다. 조금 기여했을 뿐이다.”

-노 전 대통령 서거를 보면서 권력의 무상함을 느꼈을 법한데.
“두 번째 국회의원이 됐을 때 인사드리러 가니까 ‘내가 너를 수십 년간 봐왔는데 사업했으면 큰돈을 벌었을 거다. 정치는 그만하라’고 하시더라. 내가 어린 나이에 세속적으로 보면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는 자리까지 갔다. 하지만 산이 높으면 계곡도 깊은 법이다. 등산하다 보면 큰 고목나무가 쓰러져 있는데 바로 썩지 않고 이끼도 끼고 그 안에서 생물도 태어나고, 품위 있는 모습이 마치 생명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인간의 육신은 뭔가…. 그래서 항상 축사할 때 맨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계절에도 봄·여름·가을·겨울이 있고 인생에도 4계절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음과 건강만큼은 꼭 봄날 같으십시오.’ (모든 건 결국) 다 쓰러진다. 다 사라진다.”

-노 전 대통령이 왜 좋아했다고 보나.
“내가 해나가는 제안의 구체성 같은 거였을 거다. 실제로 내가 노 전 대통령을 자주 보진 않았다. 다만 고비고비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함께했다. 가령 부산 지역구를 그만두고 서울 종로로 오게 된다든지,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를 한다든지, 대통령선거 때 광고를 한다든지. 나는 사람들 얘기를 많이 듣고 가설을 두루 세우는 편이다. 경우의 수를 만들고, 깊이 있게 생각하고, 결정할 때는 등산을 오래 하고, 확신이 서면 말씀을 드린다. 그런 과정이 많았기 때문에 좋게 생각하셨던 것 같다.”

-이명박 대통령과 찍은 ‘좌희정 우광재’ 사진이 화제가 됐다. 모두 활짝 웃고 있던데.
거침없던 그가 이 대목에서 한동안 말을 멈췄다. 천장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슬쩍 이슬이 비쳤다. “음…, 음…,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마음이지. 내가 노 대통령과의 그걸 어찌 잊을 수 있겠나. 그건 그거고…. (한 번 더 호흡을 가다듬은 뒤) 도지사와 현직 대통령은 모두 국민이 선택하지 않았나. 그것 나름대로 질서로서 존중될 필요가 있다.”

-3일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린다. 새 민주당에 하고 싶은 말은.
“또 정치 얘기를 해야 하나. 이젠 관심을 안 가져서 잘 모르겠는데(웃음). 나폴레옹이 했던 말 중에 가장 와닿는 게 ‘정치가는 희망을 파는 상인’이란다. 정말 우리는 희망을 팔고 있는가. 그것도 말이 아니라, 오늘도 힘겨운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일용할 수 있는 희망을 팔고 있는가. 그들을 위한 구체적인 삶의 개선방안을 내야 한다. 내가 오늘 참고 견디면 어떤 미래가 있을지 청사진을 줘야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어디에서 올까. 나는 ‘경청’에서 온다고 믿는다. 나를 비롯해 더 많은 정치인이 말보다는 삶 속에 있어야 할 거다. 정치는 유통업이다. 빌 게이츠가 생각의 속도를 말했는데, 정치도 결국 유통의 속도를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하느냐가 관건이다.”

-지지 후보는 있나.
“이번 전당대회는 관여하지 않고 도정에만 전념하겠다는 생각을 확실히 갖고 있다. 내가 만능인이 아니잖나. 도청 공무원들과 힘을 합해 성과를 내는 게 강원도민에게 은혜를 갚는 길이다. 정치에 기웃거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겨울올림픽이 2018년 2월인데, 그때도 강원도지사로 있을 건가.
“두 번은 해야 하지 않겠나.”

-그 사이에 대선도 두 번이나 있는데.
“자리를 좇아가는 사람 치고 잘되는 자를 못 봤다.”

-이번 도지사 임기도 끝까지 채울 건가.
“물론이다.”

인터뷰가 끝나자 이 지사는 막국수라도 같이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의 일정은 저녁에도 빡빡했다. 다음에 서울 올라오면 소주 한잔하기로 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그가 다음에 풀어놓을 얘기 보따리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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