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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중건은 왕조 붕괴 앞당긴 허영뿐인 대역사

대원군이 거주하던 운현궁의 노안당(사진 위)과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쓴 것으로 대원군을 뜻하는 ‘석파선생’이란 글자가 눈에 띈다. 사진가 권태균
개국군주 망국군주 고종② 민생파탄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대원군의 극적인 등장은 대왕대비 조씨와 대원군 사이의 정치적 밀약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 해 전인 철종 13년(1862) 2월 4일 경상도 단성(丹城)에서 농민들이 관아를 공격해 현감이 도주했고, 열흘 뒤에는 경상도 진주에서 농민들이 관아와 양반 사대부가를 공격했다.

농민항쟁의 불길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일대로 삽시간에 퍼져나가 삼남농민항쟁(임술농민항쟁)으로 확대되었다. 제주도와 함경도까지 확산된 전국적 규모의 농민봉기는 개국 이래 초유의 일이었다. 소수 노론벌열이 독점한 세도정치는 이런 난국을 극복할 능력이 부족했다. 극복은커녕 세도정치의 통치행태가 민란의 원인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했고 이것이 안동 김씨조차 대원군의 집권을 저지하지 못했던 한 요인이었다.

농민들을 봉기하게 한 직접적 이유는 삼정(三政) 문란이었다. 삼정은 농지에 대한 세금인 전정(田政), 병무행정인 군정(軍政), 빈민 구제행정인 환정(還政)을 뜻하는데 각종 탈법과 부정부패가 난무했다.

당백전 앞면과 뒷면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 비용이 부족하자 실질가치와 명목가치가 다른 당백전을 유통시켜 경제를 혼란에 빠뜨렸다
전세(田稅)는 신분을 막론하고 농토가 있는 모든 백성에게 부과되어야 하지만 양반 사대부들은 수령·서리(胥吏:아전 등)들과 결탁해 자신들의 농지를 부과 대상에서 누락시키는 은결(隱結:탈세전)로 만들었다. 반면 상민(常民)들은 농지는 없지만 전세가 부과되었는데 이것이 ‘없는 땅에 징수한다’는 백지징세(白地徵稅)였다. 대원군은 전국적인 농지조사사업[査結]을 벌여 막대한 은결에 세금을 부과했다. 비록 문제의 본질인 지주-전호(佃戶:소작)제의 문제점에까지 손을 대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도 노론 일당독재 체제에서는 보기 힘든 개혁이었다.

환곡(還穀)은 곡식이 부족한 춘궁기(春窮期)에 가난한 백성들에게 관곡(官穀)을 빌려주었다가 가을 수확기에 1할의 이자를 덧붙여 받던 빈민 구제책이었다. 삼국사기 고구려 고국천왕 16년(194)조에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수천 년 지속된 빈민구제책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들어 환곡은 백성들의 등골을 빼는 강제 고리대로 전락했다. 심지어 중앙정부도 환곡을 빈민구제책이 아니라 부족한 재정을 메우는 수단으로 활용했으니 지방정부는 말할 것이 없었다. 수령과 아전들은 백성들에게 강제로 환곡을 배정하는 억배(抑配)나 강제로 빌려주는 늑대(勒貸)를 실시했는데, 겨나 쭉정이 심지어 모래까지 섞어 주었다. 강제로 떠맡겨진 환곡이 한 집당 8~9섬(石)에서 50~60섬까지에 이르렀다. 환곡을 거두어들일 때는 낙정(落庭:벨 때 땅에 떨어진 곡식)·간색(看色:곡식 검사비 및 보관비)·인정(人情:뇌물 형식의 선물) 등이 1섬(石)당 7~8말(斗)까지 이르면서 이자만 7~8할에 이르는 악성 고리대가 되었다.

장부상으로만 남아 있는 허류(虛留) 환곡이 막대했는데 대부분은 수령과 아전들이 빼돌리거나 세도정권에 상납한 포흠(逋欠:착복)이었다. 대원군은 120만 석에 달하는 포흠 환곡을 탕감하는 한편 1000석 이상 포흠한 경우는 효수형에 처했다. 그리고 고종 4년(1867)에는 환곡제를 사창제로 바꾸었다. 환곡제가 관 주도라면 사창제는 민(民) 주도라는 점이 달랐다. 백성들은 면 단위로 사수(社首), 마을[洞] 단위로 동장(洞長)을 선출해 환곡을 자율적으로 운영하게 한 제도였다. 이자도 한 섬당 한 말 다섯 되로 한정했다.(고종실록 4년 6월 11일)

군정(軍政)의 폐단도 환곡 못지않았다. 다산 정약용은 순조 3년(1803) 유배지 강진에서 끔찍한 소식을 들었다. 생후 삼일 된 아이가 군적(軍籍)에 올라 군포(軍布)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전에게 소를 빼앗긴 백성이 “이 물건 때문”이라며 자신의 음경을 잘랐고, 그 부인이 피투성이가 된 음경을 들고 관아에 와서 울부짖었다는 소식이었다. 이때 다산이 지은 시가 ‘애절양(哀絶陽:양근을 자른 것을 애달파함)’이다.

“시아버지 삼년상 이미 지났고 갓난아이 배냇물도 안 빠졌는데/ 삼대 이름이 모두 군적에 실렸네(舅喪已縞兒未<6FA1>/三代名簽在軍保)… 부호들은 일년 내내 풍류나 즐기면서/ 낟알 한 톨 비단 한 치 바치는 일 없구나(豪家終歲奏管弦/粒米寸帛無所捐).”
상민들의 갓난아기는 황구첨정(黃口簽丁), 죽은 사람은 백골징포(白骨徵布)로 군포를 징수했지만 양반 사대부는 합법적으로 군포 납부 대상에서 면제되었다. 견디다 못한 백성이 도망가면 가족에게 씌우는 족징(族徵), 가족이 모두 도주하면 이웃에게 씌우는 인징(隣徵)이 덮쳤고, 이웃도 도주하면 마을 전체에 씌우는 동징(洞徵)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았다. 이는 상민뿐 아니라 양반 사대부도 군포를 납부하면 해결되는 문제였지만 양반들은 “우리가 어떻게 상놈들처럼 군포를 낼 수 있느냐”라면서 강하게 반발했다. 그래서 영조도 양반 사대부는 계속 면제하되 상민들의 부담만 매년 2필에서 1필로 반감해 주는 균역법으로 미봉했던 것이다.

대원군은 수백 년 지속된 이 폐단에 과감하게 칼을 대 고종 8년(1871) 양반·상민의 구별 없이 모든 집이 군포를 내게 하는 호포법(戶布法)을 강행했다. 비로소 양반들도 병역의무를 수행하게 된 것이다. 대원군은 삼정을 개혁했지만 자신의 독자적 발상은 아니었다. 삼남민란이 거세게 일던 철종 13년(1862) 5월 세도정권은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했다. 대원군의 개혁안은 대부분 삼정이정청에서 논의된 내용들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세도정권은 삼정 문란으로 발생하는 이익구조의 정점에 있었기 때문에 실천의지가 미약했던 반면 대원군은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실천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대원군 집권 기간에는 철종 말엽의 삼남 농민항쟁 같은 대규모 민란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원군 집권기에 발생했던 민란들은 그 성격이 과거와는 달랐다. 고종 6년(1869) 3월 전라도 광양에서 민회행(閔晦行)이 주도한 민란은 조선 왕조의 전복 자체를 목적으로 삼았다. 고종 6년(1869)부터 8년(1871)까지 충청도 진천과 경상도 진주·영해·문경 등에서 연속 변란을 기도했던 이필제(李弼濟)도 마찬가지로 조선왕조의 전복을 목표로 삼았다. 이들 향반(鄕班:몰락 양반) 지식인들은 정감록(鄭鑑錄)이나 동학 등을 이념으로 조선 왕조 자체를 부인했다. 고종 31년(1894) 전국을 휩쓰는 동학농민혁명의 불씨가 이미 여기저기에 뿌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삼정의 문란은 백성들을 들고 일어서게 하는 표면적 동기에 불과했다. 그 내면에는 새로운 체제를 갈구하는 흐름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대원군은 이런 시대적 변화를 읽어내지 못하고 왕권 강화라는 봉건적 틀 속에서 문제에 접근했다. 경복궁 중건사업이 대표적인 시대착오적 정책이었다. 고종 2년(1865) 4월 영건도감(營建都監)이 설치되면서 경복궁 중건사업이 시작된다. 표면상으로는 대왕대비 조씨의 명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처럼 막대한 일은 나의 정력으로는 모자라기 때문에 모두 대원군에게 위임했으니 매사를 반드시 의논하여 처리하라(고종실록 4년 4월 3일)”는 대왕대비의 지시처럼 대원군이 주도한 것이었다. 이 문제로 회의가 열렸을 때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이경재(李景在)가 “현재 국가경영[國計]은 대역사를 벌이지 않아도 오히려 군색해지고 넘어질까 우려됩니다”라고 우려한 것처럼 대역사를 벌일 때가 아니었다. 반면 판중추부사 이유원(李裕元)은 “모든 백성이 제집 일처럼 떨쳐나설 것”이라고 거들고 좌의정 김병학(金炳學)은 “나라에 큰 공사가 있을 때 백성의 힘을 빌리는 것은 어버이의 일을 도우려고 아들들이 달려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가세했다.

왕조의 전복을 꿈꾸는 세력이 여기저기서 꿈틀거리고 있는 판국에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대역사를 국가와 백성을 부자관계로 설정하는 시대착오적 발상으로 합리화했다. 공사자금이 부족하자 대원군은 ‘자진해서 납부한다’는 원납전(願納錢)을 징수했는데, 원납전은 결국 관직매매전으로 변질되었다. 그래도 자금이 부족하자 기존의 전세(田稅)에 1결당 전 100문(文)을 더 받는 결두전(結頭錢)을 신설했다. 원납전은 원망하며 낸다는 원납전(怨納錢)으로 불렸고, 결두전은 신낭전(腎囊錢:사내라면 내는 돈)으로 불렸다. 게다가 대원군은 현실을 무시한 각종 경제정책으로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갔다. 고종 3년(1866) 당백전(當百錢)을 유통시키더니 이듬해에는 가경통보(嘉慶通寶) 같은 값싼 청나라 동전[淸錢]을 대량 수입해 유통시켰다. 실질가치가 명목가치의 20분의 1에 자니지 않는 당백전이나 2분의 1 내지 3분의 1에 불과한 청전(淸錢)은 상평통보(常平通寶)를 무력화시키면서 악성 인플레이션을 유발시켰다. 경제가 무너지자 백성들은 대원군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내정의 실책보다 더 큰 문제는 시대착오적인 대외정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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