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존 레넌과 용띠 동갑 황인용, TBC 출신 라디오 스타 ‘비틀스는요 …’

지금은 가요의 전성시대지만 1970~80년대는 팝송이 대세였다. 놀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 사람들은 라디오 방송에 귀 기울이며 듣고 싶은 팝송이 나오길 기다렸다. 옛 TBC(동양방송)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와 KBS의 ‘황인용의 영팝스’ 진행을 맡았던 황인용 전 아나운서는 그래서 그 시대의 ‘라디오 스타’였다. 10년 넘게 DJ를 하면서 아마도 그가 가장 많이 틀어준 음악은 비틀스의 노래가 아니었을까. 경기도 파주의 예술인 마을 헤이리에 있는 클래식 음악감상실 ‘카메라타’에서 지난달 28일 그를 만났다. 2004년 그가 세운 곳이다.



“현대의 모차르트와 마찬가지 아닐까요”

글=박현영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콘크리트에 덧칠을 하지 않은 네모난 건물의 오른쪽은 음악감상실, 왼쪽은 그가 사는 집이다. 육중한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가 DJ석에 앉아 있었다. LP판 1만5000장에 둘러싸인 채. 청바지에 줄무늬 티셔츠, 스웨이드 재킷 차림의 그가 취재팀을 구석 테이블로 안내했다. 천장을 유리로 덮어 자연 빛이 가득 들어오는 자리였다. 주위에는 머리를 단정히 빗은 노신사와 정장 차림의 할머니, 등산복 차림의 30대 커플, 앳된 얼굴의 20대 여성 등 손님 예닐곱 명이 대화를 하고 있었지만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클래식 선율만 가득했다.



● 손님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요.



“괜찮아요. 조용히 얘기하면 돼요.”



● 이제 방송은 하나도 안 하시나요.



“거의 안 한다고 봐야죠. 마지막 지상파 방송은 1997년 11월이었어요. 똑똑히 기억하는 건 그때 IMF가 터졌거든. 제작비 많이 드는 프로그램들을 없애면서 그만두게 됐어요. IMF 실업자가 됐지, 하하. 20세기 저물어 갈 무렵 황인용도 많이 저물었어요. 나는 20세기의 인물이라고!(웃음)”



● 아쉬움이 있겠습니다.



“방송에 관해선 여한이 많아요. 그런 식으로 그만두려고 안 했거든. 근사한 호텔의 그랜드볼룸을 빌려 내 돈 들여 1시간30분 정도 고별쇼를 하고 싶었어요. 제 프로에 나와서 인연이 됐던 분들, 김동길 교수님이나 이어령 선생님 같은 분들을 초대해 대접하고, 지나간 얘기도 하고, 열심히 연습해 노래도 두세 곡 부르고, ‘그동안 신세졌습니다. 평범한 삶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려고 했는데 흐지부지됐어요. 교통방송을 6~7년 더 하고 2004년 완전히 그만뒀어요.”



● 팝송이 아닌 클래식 공간이라는 게 뜻밖인데요.



“막연히 ‘음악을 듣는 공간이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생각했어요. 제가 예술과 문화에 대한 허영심이 약간 있어요. 인간은 먹고사는 일 말고 또 다른 뭔가가 있어야 된다, 여타 동물과 다른 게 그거다 생각하거든요. 그 (형편) 어려운 대학생 때도 신문 문화면을 즐겨 봤어. 서평, 영화평 같은 것들. 클래식을 하게 된 건 어쩌면 너무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어요. 체계적으로 공부할 기회가 없었으니까 배우고 싶었다고 할까. 공부하면 할수록 감상의 폭이 넓어지는 게 매력이죠. 잠깐, LP 좀….”



음악이 끊겼다. 그가 LP판을 바꾸기 위해 일어섰다. 2시간여 동안 그는 네 번 자리를 떴다.



● 음악을 매일, 직접 틀어주십니까.



“아침에 문 열기 전에 두 시간 정도 혼자 음악을 들어요. 그 시간이 너무 좋아요. 오전 11시 손님이 오기 시작하면 음악을 틀어드리는 게 제 역할입니다. 원래 이 일을 시작할 때는 문 닫고 싶을 때 닫고, 열고 싶을 때 열려고 했는데 세상 일이 그렇게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



# 비틀스를 돌아보다



턴테이블에 음반을 걸고 나면 그는 화이트보드에 작곡가와 제목을 써 준다.



● 음악은 어떻게 고르세요.



“골고루 틀어요. 음악의 구성과 내용이 꽉 찬, 심포니를 틀면 다음엔 좀 가벼운 피아노 솔로나 바이올린 소나타를 틀어 안배를 해요. 바로크 음악은 오전에 어울려서 낮 12시 전후에 틀지요. 현대음악도 틀고 영화에 나온 클래식이나 ‘넬라 판타지아’(영화 ‘미션’의 삽입곡)처럼 대중적 인기가 있는 곡도 넣어요.”



● 팝송도 가끔 트나요.



“가뭄에 콩 나듯 틀기도 해요. 단 비틀스의 명곡들은 종종 올려요. 어떤 때는 후회가 좀 돼요. 왜 팝송 LP 컬렉션을 안 했을까.”



그는 비틀스의 원곡은 물론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비틀스, 고전음악에 비틀스 노래를 입힌 ‘비틀스 온 바로크’ 앨범, 비틀스 노래를 실내악으로 편곡한 ‘비틀스 콘체르토’를 자주 들려준다.



● 어떤 곡들을 좋아합니까.



“음악적 기반이 없어 그런지 비틀스가 처음 나왔을 때는 좋아하지 않았어요. 이해가 안 가는 거야. 처음엔 엘비스 프레슬리, 프랭크 시내트라, 냇 킹 콜, 빙 크로스비 같은 이지 리스닝, 어덜트 컨템퍼러리를 들었어요. 우리나라로 얘기하면 ‘뽕짝’ 같은 거지. 그런데 음악은 듣다 보면 성향도 발전해요. 그런 음악은 몇 번 들으면 좀 질리거든. 그러면서 딥퍼플의 ‘에이프릴’, 유라이아 힙의 ‘줄라이 모닝’, 레드 제플린의 ‘스테어웨이 투 헤븐’, 퀸의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 같은 록 발라드를 좋아하게 됐어요. 그 후 비틀스도 제대로 듣게 됐고.”



● 비틀스는 클래식과도 맥이 통하지 않나요.



“비틀스의 매니저를 했던 브라이언 엡스타인도 클래식에 조예가 깊었어요. 프로듀서 조지 마틴도 원래는 EMI에서 클래식을 담당한 PD였고. 비틀스의 역사를 보면, 조지 마틴이 EMI에 근무하고 있는데, 어떤 친구가 전화해 ‘이 음악은 꼭 들어봐야 한다’고 자꾸 성가시게 구는 거야. 다른 데서 다 배척받은 거지. 하도 조르니까 한번 와봐라 했더니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온 거야. 그러니까 그것도 운명인 거예요. 『광기와 우연의 역사』를 쓴 슈테판 츠바이크가 얘기한 대로 세상은 운명과 우연의 일치로 움직인다는 게 비틀스에도 그렇게 작용했다고 봐요. 조지 마틴은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있었으니까 비틀스의 음악이 남다르다는, 내재된 뭔가를 읽어낸 거지.”



● 비틀스를 어떻게 평가하세요.



“처음엔 미국에서도 계속 거부당하다 ‘아이 워너 홀드 유어 핸드(I Want to Hold Your Hand)’가 대히트를 하면서 빌보드를 석권하고 ‘에드 설리번 쇼’에까지 나가게 되지. 천문학적 수의 팬이 모여들자 ‘영국의 침공이 시작됐다’는 표현까지 등장한, 문화사적으로 대단히 의미 있는 사건이 돼요. 비틀스가 팔아 치운 음반이 클래식 전체 판매량에 필적한다고 해요. 지금도 살아 있는 그룹이나 마찬가지예요. 연 2000만 달러 이상의 소득을 올린다고 하지요, 아마? 현대의 모차르트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특히 ‘예스터데이’쯤 오면 실제로 클래식의 현악 4중주를 도입하죠.”



● 존 레넌이 황 선생님과 같은 1940년생입니다.



“어, 그 친구 용띠네. 존 레넌의 음악사적 가치로 볼 때 탄생 70주년을 너무 조용히 지나가는 게 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특집 공연이나 이런 게 더 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 비틀스 곡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인이 사랑하는 팝송 수위에 꼽히지요. 비틀스는 왜 시간을 초월할까요.



“음악의 내용과 구성이 새로운 스타일이었어요. 그 안에 들어 있는 메시지도 그동안 팝의 통상적인 가사 내용과 너무나 달랐지요. 꼭 사회적인 메시지뿐 아니라 사랑을 얘기하더라도 말이죠. 운영의 측면에서 보면 자급자족하는 기능, 즉 음악의 생산·연주·아이디어를 모두 네 명 안에서 해결했어요. 무엇보다 그 참신함 때문에 지금도 생명력이 있는 거예요. 클래식 음악이 200년 이상 가듯 비틀스 음악도 그렇게 갈 거예요. 다음 세대는 ‘20세기 중반을 넘어 후반에 이런 음악이 있었다’고 얘기할 거예요.”



# 오디오에 빠지다



● 학창 시절 음악깨나 들었을 것 같아요.




“중고등학교 때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어요. 50~60년대 보통 가정에서 태어난 대부분의 사람은 음악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라디오가 얼마나 비쌌는데…. 소형 트랜지스터로 듣거나 간간이 학교에서 교내방송을 틀어줄 때 듣는 정도였지.”



● 그런데 어떻게 오디오에 관심을 갖게 됐나요.



“음악을 배울 환경은 안 됐어도 음악을 듣는 감성은 타고난 것 같아요. 음악이나 오디오에 대한 열망이 상당했던 것 같아요. 1974년께 TBC의 ‘장수만세’란 프로그램으로 방송의 날에 상을 받았는데, 상금 20만원으로 금성사에서 나온 스피커 두 개짜리 오디오를 샀어요. 생활비도 부족할 때였는데…. 80년께 프리랜서로 독립한 후에는 집에 생활비를 갖다주고, 나머지는 들고 세운상가로 달려갔지요.”



카메라타에 들어서면 초대형 스피커 5개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3층 높이의 천장까지 닿을 듯하다. 지금은 없어진 미국의 웨스턴일렉트릭과 독일의 클랑필름 제품들이다. 모두 1930년대에 만들어졌다. 미국산은 극장에서 쓰던 것이고, 독일산은 히틀러가 썼던 것과 같은 제품이다. 10여 년에 걸쳐 하나씩 사 모았다.



● 돈이 꽤 들었겠어요.



“ 지금 장만하려면 몇 억원은 있어야 해요. 20년 전 700만원 주고 산 우퍼가 지금은 5000만~6000만원 가요. 중국 부자들이 오디오에 눈을 뜨면서 빈티지 오디오 수요가 늘어 그래요. 생활 수준이 올라가면서 문화에 대한 욕구는 자연스럽게 생기나 봐요. 하긴 일본인들이 아니었으면 빈티지 오디오가 이렇게 남아 있지도 않을 거예요. 60~70년대 오디오가 고철로 팔려나갈 때 그 가치를 알아내서 컬렉션을 시작한 사람들이 일본인들이에요.”



● 이 많은 LP판은 어떻게 모았습니까.



“좀 부끄럽습니다. 음반 컬렉터는 음반에 대한 지식이 많아야 해요. 몇 년에 녹음했고, 녹음기사와 프로그래머는 누구고, 어떤 음반사에서 몇 번째로 찍은 것인지, 공부할 게 무지 많아요. 그런 해박한 지식의 토대 위에 서지 못한 나는 컬렉터는 아니에요. 그냥 좋아하니까 100장씩도 사고 그랬지. 사실 음반 컬렉터는 한 장 한 장 공들여 삽니다. 80~90년대엔 내가 한참 바빠서….”



● 기증도 받았나요.



“아,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님이 음반 500장을 기증해 주셨어요. 현대음악부터 고전 바로크까지 다양합니다. 주미 대사를 하셨던 김경원 박사, 김용원 회장님(도서출판 삶과꿈), 정흥숙 교수(중앙대 명예교수)도 주셨어요. 기증 음반은 모으신 분의 취향까지 따라옵니다.” 그의 LP꽂이에는 ‘홍석현 회장 컬렉션’ ‘삶과 꿈 컬렉션’ 같은 이름표가 붙어 있다.



● 앞으로 계획은요.



“유럽 문화를 공부하고 싶어요. 이탈리아 북부와 오스트리아, 독일 쪽으로 음악 관련 문화유산을 찾아보는 여행을 할 거예요. 제 오디오는 아직 미완성이에요. 결정적으로 미흡한 부분이 두 군데 있는데, 그 부품을 오리지널로 바꿨으면 좋겠고요.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는 아는데, 워낙 비싸서…. 좋은 음반도 더 모을 거예요.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완성해 주겠죠. 비틀스가 역사에 남듯, 이 공간이 남을 수 있을지….”






j칵테일 >> “끝으로 … 다시 만날 때까지 … 여기는 HLKC 동, 양, 방, 송, 입니다.”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으로 1980년 11월 30일 동양방송(TBC) 종방과 함께 TBC 사기가 내려지고 있다.
“ TBC 동양라디오 밤을 잊은 그대에게, 저 황인용입니다. (중략) 그동안 TBC를 아끼고 격려해 주신 여러분, 이제 마지막 시간을 함께하기 위해 마이크 앞에 앉았습니다. 오늘 자정을 기해 여러분 곁을 떠나려 합니다. (중략) 남은 5분이 너무 야속합니다. (울먹임) 여러분이 아끼던 동양방송은 사라져도, 동양방송의 기억을 묻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몸 건강히 안녕히 계십시오. 끝으로 … 여기는 639 킬로헤르츠, HLKC 동, 양, 방, 송, 입니다.”



1980년 11월 30일 자정. 황인용 아나운서는 신군부의 방송 통폐합 정책으로 사라진 동양방송의 마지막 방송을 했다. 자정을 기점으로 전파 송출을 중단해야 했기 때문에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진행되던 이 프로그램이 반 토막이 난 채, 마지막 방송이 되고 말았다. 애써 울음을 참으려는 그의 목소리는 신군부 통치하에서 암울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날벼락이었지. (울먹였던 건) 그나마 감정이 억제된 거지, 권력의 눈치를 보느라고…. 신군부에서 마지막 방송을 할 때 ‘비장하지 않게, 우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고 지침이 내려왔었어. 이런 일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느냐고.”



그는 67년 TBC 3기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우연히 사원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했는데 덜컥 붙었다고 한다. 그가 처음부터 잘나간 것은 아니었다. “입사 후 6년 동안 프로그램을 맡지 못했어요. 일도 잘 못하고 ‘빽’도 없고…. 노인 프로그램 ‘장수만세’를 맡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우연히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맡아보라고 하더라고. 청와대에서 지시가 내려온 거예요. 청소년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며 연예인 대신 해당 방송국의 아나운서를 진행자로 쓰라고. 내가 살아온 인생은 우연이 많아요. 꼭 의지를 갖고 살아야만 인생이 의미 있어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j BEATLES >> 1962 환상의 4인조, 모습을 드러내다



1월 1일 좌절의 고통. 비틀스는 그때까지의 음악활동 중 가장 중요한 과업을 수행했다. 음반사 데카에서 첫 번째 공식 오디션을 보는 일이었다. 초조한 심정으로 15곡이 녹음됐다. 멤버들은 “합격점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데카의 녹음 담당 마이크 스미스는 “매니저 엡스타인에게 결과를 알려주겠다”고만 했다.



2월 초에 암울한 통보가 왔다. 음반을 낼 수 없다는 얘기였다. 비틀스의 출세에 음반 발매가 필수라고 봤던 엡스타인과 멤버들은 괴로워했다. 스미스는 이유를 일러줬다. “연주가 섀도즈 음악과 비슷하다. 그리고 이제 기타를 치는 그룹은 한물갔다.” 데카 관계자들은 엡스타인에게 “음반 사업이나 잘하라”고도 했다. 그들 앞에서 흥분한 엡스타인은 “비틀스는 폭발적 인기를 얻을 것이다. 엘비스 프레슬리보다 더 크게 될 것”이라고 외쳤다.



5월 9일 애비 로드 에서 나타난 든든한 후원자. EMI의 음반 브랜드인 팔로폰의 제작감독 조지 마틴은 애비 로드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엡스타인을 만났다. 비틀스 음반을 계약하자는 얘기가 오갔다. 엡스타인과 마틴의 만남은 우여곡절 끝에 연(緣)이 닿았다. 엡스타인은 음반 취입을 통해 어떻게든 비틀스를 띄우려 했지만 데카뿐 아니라 파이·오리올 같은 음반사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노(No)”.



지푸라기라도 잡을 심정이었던 엡스타인은 음반 판매 연수를 받을 때 알아뒀던 EMI 음반가게 직원으로부터 엔지니어 짐 포이를 소개받았다. 포이는 EMI 출판 자회사 간부인 시드 콜먼을 데려왔고, 그가 조지 마틴과 엡스타인을 연결시켜줬다. 일상에서 만난 ‘작은 인연’이 예상치 못한 희망과 기회를 만든 것이었다. 마틴은 비틀스 곡을 듣고선 “뭔가 호소하는 형언할 수 없는 음질”이라고 했다. 이제 음반 취입은 탄탄대로를 밟게 됐다.



초창기 비틀스의 출연료(17파운드)가 적힌 메모지.
8월 14일 링고 스타를 품다. 리버풀에서 257㎞ 떨어진 링컨셔 지역. 작은 체구에 슬퍼보이는 눈을 가진 22세의 젊은이가 리조트 캠프에서 드럼을 치며 몇 푼 수당을 챙기고 있었다. 본명은 리처드 스타키, 무대에선 링고 스타로 알려졌다. 멤버들은 당시 여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한 데다 드럼 실력은 별로였던 피트 베스트를 퇴출시키려 했다. 피트는 더벅머리 스타일로 바꾸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 결국 멤버들은 60년 함부르크 공연 때 만났던 링고 스타를 ‘뉴 비틀’로 영입했다. 이후 해산 때까지 레넌과 매카트니, 해리슨, 스타는 비틀스와 동의어가 됐다. 세인들은 이를 ‘환상의 4인조(the Fab Four)’라 불렀다. 이어 10월 비틀스의 싱글 데뷔 앨범에 수록된 ‘Love Me Do’가 히트를 치면서 광풍은 서서히 예고되고 있었다.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