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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기타는 좋은데 그걸론 밥벌이를 못해”

‘가망 없음(Hopeless)’. 존 레넌의 고등학교 3학년 성적표에 찍힌 혹독한 평가다. ‘학급에선 광대 같고, 리포트 숙제는 쇼킹하며, 다른 학생들의 시간을 갉아먹는 학생’이란 딱지도 함께 붙었다. 1940년 10월 9일 영국 리버풀의 병원에서 태어난 레넌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뱃사람인 아버지 알프레드 레넌은 늘 나가 있어 가정을 꾸리는 데 별로 보탬이 안 됐다. 힘겨웠던 어머니는 이모 미미의 손에 레넌을 맡겼다. 그의 ‘반항적 기질’은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 싹튼 것으로 보인다.



존 레넌 (John Lennon·1940~80)

어릴 때 어머니가 가르쳐 준 밴조 연주로 음악적 감수성을 키웠던 레넌은 사촌들과 공연 보는 걸 즐기다 57년 생애 첫 기타를 선물받는다. ‘쪼개지지 않는다’는 보증문구가 새겨진 싸구려 갤로톤 챔피언 어쿠스틱 기타였다. 보호자였던 이모는 시큰둥했다. “존, 기타는 좋은데 그걸론 밥벌이를 못해.” 리버풀 예술대에 들어간 그는 누드 모델 무릎 위에 앉는 등 수업 방해로 쫓겨날 위기에 놓였다. 예술대 동창생 신시아 파월은 레넌이 영화배우 브리지트 바르도에게 빠졌다는 걸 알고 금발로 머리를 물들이는 등 애정을 키워가며 62년 결혼에 이른다. 그러나 오노 요코가 등장하면서 결국 레넌과의 거리감을 좁히지 못하고 이혼했다.



80년 12월 8일, 레넌은 오노 요코와 뉴욕의 아파트 밖에서 25세 청년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이 등 뒤에서 쏜 4발의 총탄을 맞고 숨졌다. 채프먼은 비틀스, 특히 레넌의 팬이었다. 그러나 “비틀스가 예수보다 유명하다”는 레넌의 발언에 광기를 품은 것으로 알려졌다. 암울했던 유년기, 사람들과의 아픈 인연, 그 안에서 터져나온 존 레넌의 음악이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Hope)’을 줬다. 역설적이다. 사람 산다는 게 그런 걸까.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j BEATLES >> 1960 비털스에서 비틀스로



5월 세기의 그룹명 탄생. 예술대에서 레넌과 친하던 스튜어트 서트클리프가 60년 1월 기타리스트로 합류했다. 그는 ‘버디 홀리&크리켓(Crickets·귀뚜라미 )’ 밴드를 기리는 뜻으로, 그들이 밴드명의 후보 중 하나로 생각했던 딱정벌레(Beetle)에서 착안한 ‘비털스(Beatals)’를 그룹명으로 쓰자고 제안해 통과됐다. 그러나 촌스럽다는 의견에 ‘실버 비틀스(Beetles)’란 이름을 다시 붙였다. 이후 철자의 e를 a로 바꿔 ‘Beatles’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8월 독일 진출. 스트립 클럽에서 적은 돈을 받고 연주하던 힘든 시절이 계속됐다. 그러다 앨런 윌리엄스란 매니저와 손잡고 8월 17일 독일 함부르크로 진출했다. 단골들의 응원과 성화에 과장된 몸짓과 동작으로 연주했다. 이게 먹혔다. 하룻밤 사이에 스타가 됐 다.



12월 비틀스 매니어. 조지 해리슨의 어린 나이와 숙소로 쓰던 극장에 대한 일부 멤버의 방화(放火) 혐의로 3명이 추방당한 뒤 밴드는 영국으로 귀환했다. 12월 27일 리더랜드의 타운홀 공연, 폴 매카트니가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이 무대 앞까지 달려나왔다. 그들은 함부르크의 연주로 구축한 비틀스만의 스타일에 열광했다. ‘비틀스 매니어’의 탄생을 알린 순간이었다.



1961 비털스에서 비틀스로 청과류 창고의 제왕들



공연 광고. 비틀스(Beatles)이름이 확정되기 전Silver Beetles라고 써 있다.
2월 9일 리버풀 시내 매튜가(街) 10번지. 길에서 돌계단 18개를 내려가면 나오는 청과류 창고. 바로 여기에 비틀스가 성장 발판을 닦은 ‘캐번(Cavern) 클럽’이 있었다. 이 지저분한 지하소굴에서 밴드는 리버풀을 뒤흔들고 세상 밖으로 나갈 기량을 다졌다. 무대에서 70㎝ 남짓 떨어진 맨 앞줄의 여성 팬들은 괴성을 질러댔다. 이곳에서 레넌은 발 벌리고, 머리 젖힌 뒤, 기타를 가슴 위로 흔드는 도전적인 무대 매너를 선보였다. 매카트니는 귀여운 외모와 매력적인 언어로 여심을 사로잡았고, 해리슨은 미소와 익살로 여인을 녹였다.



6월 ‘더벅머리’ 스타일과 최초의 앨범. 비틀스는 다시 함부르크 여정에 올랐다. 스튜어트 서트클리프의 연인 아스트리드는 어느 날 남자친구의 머리를 직접 손질했다. 더벅머리 스타일의 ‘비틀 커트’가 탄생했다. 멤버들은 이를 보고 웃음보를 터뜨렸지만 곧 같은 모양으로 바꿨다. 이곳에서의 하이라이트는 비틀스 ‘최초의 곡 취입’이었다. 6월 독일에서 영국 가수 토니 셰리든을 위해 반주하고 자신들의 곡도 연주했다. 음반사는 멤버들이 영국으로 돌아온 뒤 ‘My Bonnie’를 비롯한 2곡을 셰리든과 비틀스 이름을 달아 싱글 앨범으로 냈다.



11월 “그 애들은 상종 말아 ?”. 비틀스는 댄스홀 최다 출연기록을 세우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멤버들은 캐번 클럽에 슬슬 싫증이 났다. 바로 이때 한 사내가 나타났다. 브라이언 엡스타인이었다. 유명한 음반가게 매니저였던 그 는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비틀스 음반을 찾는 것에 호기심을 느껴 직접 주인공을 찾아 나섰다. 이후 그들을 지켜보던 엡스타인은 매니저 계약을 했다. 전 매니저 윌리엄스는 ‘멤버들을 상종 말라’고 했지만 그는 가능성을 봤다. 비틀스와 엡스타인의 앞엔 이미 더 넓고 새로운 세상이 꿈틀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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