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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존 레넌 영혼의 동반자’ 오노 요코를 만나다

담소를 나누는 오노 요코와 생전의 존 레넌.
가냘픈 동양 여성이 보디가드로 보이는 두 서양 ‘덩치’와 함께 나타났다. 오노 요코(小野洋子·77). 사람들은 흔히 그 이름 앞에 ‘존 레넌의 부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독자적 영역을 지닌 행위예술가이자 대중음악가다. 검정 재킷과 바지가 마치 교복 자율화가 되기 전 한국 남자 중·고교생들 차림새와 비슷했다. 머리 위에 살짝 얹은 중절모와 통굽 구두까지 검정 일색이었다. 그 속에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에서 묘한 카리스마가 풍겨 나왔다. 색안경을 코 아래 걸친 건 사진으로 익숙한 모습이었다. 기자들과 눈을 마주칠 때는 고개를 살짝 숙여 맨눈의 시선을 보내왔다. 아일랜드의 아이리시 타임스와 스위스 일간지 르탕 등의 기자 6명과 함께 j가 오노 앞에 마주 앉았다.



“존의 음악은 모든 사람과 소통합니다”

런던=이상언 특파원



“만나서 반갑습니다.”



50년 이상 미국과 영국에서 살았는데도 일본식 억양이 남아 있다. 의사 표현에 어려움은 없었지만 유창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영어였다.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밝히는 데 주저하는 일본식 문화 때문인지 말끝이 흐려진다는 느낌도 받았다.



첫 질문은 아이리시 타임스 기자가 던졌다.



● 이곳에 오는 동안 존에 대한 전기를 읽었다. 존이 아일랜드 서부의 한 섬을 구입했고, 은퇴 뒤에 당신과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 했다고 씌어 있다. 그 섬은 지금 어떻게 돼 있나.



“오래전에 어린이들이 다니는 한 학교에 기증했다. 관리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돌아갔다고 생각한다.”



● 존 레넌은 자신이 아일랜드계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했나(레넌은 1840년대의 아일랜드 대기근을 피해 영국 리버풀로 건너온 제임스 레넌의 증손자다).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존은 북아일랜드에도 여러 차례 갔다. ‘선데이 블러디 선데이’는 그가 북아일랜드에 머물렀을 때 만든 노래다.”



오노는 레넌이 북아일랜드 사태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까지 밝히며 그 기자의 애국심을 채워줬다. ‘블러디 선데이’(피의 일요일)는 1972년 북아일랜드의 아일랜드계 주민 13명이 영국 경찰의 발포로 숨진 사건을 일컫는다.



다행스럽게도 이탈리아 기자가 화제를 아일랜드에서 꺼내왔다.



● 실제 나이보다 스무 살은 젊어 보인다. 비결을 알려달라(77세의 노인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오노의 피부는 팽팽했다).



“그렇게 보인다면 아마도 바쁘게 사는 게 도움을 줬을 것이다.”



● 어떤 음식을 주로 먹나.



“우선 음식을 되도록 많이 먹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리고 생강을 많이 먹는다. 간 생강을 뜨거운 물에 넣어 차로 마신다. 커피나 차에 생강가루를 넣기도 한다. 정해진 횟수는 없다. 존이나 나는 원래 규칙 같은 것을 싫어했다. 많게는 하루에 여덟아홉 번 정도 그냥 생각날 때 마신다.”



비로소 대화는 본론으로 접어들었다. 레넌의 생일(10월 9일)에 맞춰 런던의 EMI 스튜디오에서 준비되고 있는 새 앨범 작업에 관한 것이었다.



● 과거의 노래들을 가지고 다시 작업하는 소감이 어떤가.



“정말 매우 바쁘고 피곤하지만 이런 행운을 가진 걸 기쁘게 생각한다. 최고의 전문가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도 즐겁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간간이 고통이 느껴진다. 노래에 얽혀 있는 과거 기억들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 그건 어떤 느낌인가.



“나는 되도록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전문 음악가의 입장에서 일하려 하지만 순간순간 다가오는 감정을 떨치기는 힘들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스트립드 다운(stripped down)이라고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악기 소리를 줄이고 가수 목소리를 더 잘 들리도록 하는 일이다. 따라서 새 노래에서는 존의 목소리가 더욱 또렷이 들린다. 그의 노래는 환상적이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노래에 감동을 받는다. 새 노래에서는 그의 리버풀 악센트도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그가 노랫말에 고전적 영어 어휘를 많이 사용한다는 것도 다시금 뚜렷이 느낄 수 있다. 그는 진정한 엔터테이너였다. 정말 다재다능했다.”



● 스트립드 다운을 하는 이유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기본적으론 노래 속 존의 목소리가 더욱 잘 들리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앨범을 다시 만드는 이유는 요즘 사람들이 듣는 존의 노래는 존이 활동할 때 듣던 노래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최신 기계의 작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 기존 앨범과 새것의 가장 큰 차이는.



“1970, 80년대의 리믹싱은 주로 악기 연주 소리를 크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반대했지만 당시에는 그게 유행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여러 밴드가 가사 전달이 잘 되도록 작업을 한다. 새 앨범에서는 존이 노래한 아름다운 노랫말이 소리에 덜 파묻힌다.”



● 새 앨범에 담기는 노래 중 어떤 것에 가장 애착이 가나.



“내가 관여하고 있는 노래는 80곡이다. 그중 어떤 게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하기가 힘들다. 가장 아끼는 곡이 있으면서도 표현 못하는 것이라고 여러분들은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진심이다. 그는 정말 모든 노래마다 완벽했다. 나는 전문 예술가로서 그 노래들을 하나하나 다 사랑한다.”



● 새 앨범의 노래들은 원래 노래들과 어떻게 다른가. 가장 사랑 받는 곡 중 하나인 ‘이매진(imagine)’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노랫소리가 좀 더 분명하다는 것 말고는 다른 큰 차이는 없다.”



● 새 앨범은 기존 팬뿐 아니라 현재의 젊은 세대도 소비자로 겨냥하고 있는 듯하다. 힙합이나 리듬 앤드 블루스(R&B)를 즐겨 듣는 젊은이도 이 앨범을 좋아할까.



“존의 음악은 모든 종류의 사람과 소통하는 힘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젊은층들도 그의 음악을 즐겨 듣지 않는가. 그의 음악은 세대를 뛰어넘은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 존의 목소리가 더욱 생생한 새 노래들을 들을 때의 심정은.



“그가 이 노래들을 만들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 가슴 아프다. 크게 두 가지가 나를 괴롭힌다. 하나는 그의 노래 중에 슬픈 노래가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나 때문에 그런 노래가 많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레넌은 오노를 만난 뒤 첫 부인과 이혼했고, 그의 아들과 헤어졌다. 오노와의 11년 결혼 생활 중에도 2년의 별거 기간이 있었다). 또 한 가지는 존이 살아 있을 때 그에게 제대로 경의를 표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음악은 정말 훌륭하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는 뛰어난 예술가였다.”



대화는 새 앨범 작업에서 레넌에 대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기자들과 오노는 모두 존 레넌을 존이라 불렀다.



● 존이 살아 있다면 어떤 음악을 하고 있을까.



“당신처럼 나도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그가 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것을 좋아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컴퓨터의 도움을 받는 음악을 즐기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한다. 컴퓨터로 음악을 만들 뿐만 아니라 컴퓨터로 많은 사람과 의사 소통을 하고 있을 것 같다.”



레넌이 살아 있다면 지금 70세다. 기자들이 의외의 대답이라는 반응을 보이자 오노는 이렇게 덧붙였다.



“존은 늘 시대를 앞서가고 있었다. 그는 생전에 ‘머지않아 글로벌 빌리지가 실현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의 예언은 실현됐다. 그가 살아 있다면 아마도 ‘내가 말했잖아’라고 얘기했을 것이다.”



오노 요코가 9월 3일 리버풀에 있는 존 레넌의 옛 집을 찾았다. ‘멘딥스(Mendips)’로 불리는 이 집은 마흔 살에 세상을 떠난존 레넌이 다섯 살부터 스물세 살까지 살았던 곳으로 일생 동안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공간이다. [AP=연합뉴스]
● 존은 이토록 오래 대중의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단지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에 대해 반감을 가진 사람도 많았다.”



인터뷰가 종반으로 가면서 오노가 불편해할 만한 질문들이 나왔다. 레넌의 죽음과 오노에 대한 비틀스 팬들의 반감 등에 관한 것이었다. 레넌은 30년 전인 1980년 12월 8일 미국 뉴욕에서 팬을 자처한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의 총격에 의해 살해됐다. 이후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정치적 암살설이 꾸준히 제기됐다. 레넌이 기존의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급진적 문화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보수 정치세력 또는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그를 제거했다는 주장이다.



● 레넌의 죽음은 당신에게 어떤 것이었나.



“나와 존은 공동의 창조자였다. 우리는 세계 평화를 위해 일했다. 그러다 존이 내 앞에서 쓰러졌다. 처음에는 ‘누가 죽였나’만 되뇌었다. 당시에는 ‘존의 죽음 뒤에는 누가 있는가’ 그런 생각뿐이었다.”



● 정치적 암살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 답을 알지 못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재의 나는 오랜 고통의 시간을 거친 뒤 더 이상 ‘누가 그를 죽였나’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나는 존과 내가 해왔던, 세계 평화를 위한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 당신과 존 사이의 아들 션(35)의 생일은 공교롭게도 존의 생일과 같다. 아버지의 생일이 되면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이 때문에 션이 고통을 받지는 않나.



“매년 그때가 되면 힘든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많은 것을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감사하게 생각한다.”(션은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오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통상 레넌과 관련된 범위를 넘기 힘들다. 하지만 레넌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라고 오노를 표현했다. “모든 사람이 그의 이름을 알지만 정작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오노는 작곡가·가수·피아니스트로 활동해 왔다. 16편의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전위적 행위예술도 계속 펼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우선적 관심은 레넌과 관련된 것이다. 큰 빛 옆의 작은 빛이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존은 생전에 당신이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어줘 진정한 음악가가 됐다고 말했다. 당신이 선생이고 자신은 학생이라는 표현도 했다. 뭘 어떻게 했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내게서 뭔가를 배울 순 있었겠지만 내가 특별히 한 것은 없다. 동반자로서 자연스럽게 서로 배우는 게 있지 않았나 싶다. 어쩌면 나는 그에게 아주 이질적인 사람이었다.”



● 당신과 존은 세계 평화를 위해 일했다고 했다. 지금의 세상이 60, 70년대보다 더 평화로워졌다고 생각하나.



“지금 세계가 아름답고 강력한 평화의 세계 입구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점점 평화에 다가가고 있다고 믿는다. 아마도 인류의 생존본능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미디어는 늘 재앙이나 끔찍한 일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우리가 주위를 살펴보면 세상은 훨씬 평온하다.”



● 비틀스의 팬 중 당신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그들과의 화해를 시도할 생각은 없나(많은 사람은 그가 비틀스 해체(1970년)의 원인이 됐다고 믿는다. 또 레넌이 남긴 음악과 정신을 이용해 과분한 개인적인 부와 명성을 얻고 있다고 비판해 왔다. 이에 대한 오노의 대답은 짧지만 분명했다).



“존이 남긴 음악과 정신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도록 돕는 것이 내가 비틀스 팬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다.”






j칵테일 >> 보도유예 요청 받은 3달 전 인터뷰



이 인터뷰는 석 달 전인 6월 22일 영국 런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에서 이뤄졌다. 북쪽으로 하이드파크가 바라보이는 이 호텔은 존 레넌과 오노 요코가 1966년 처음 만난 인디카 갤러리에서 3㎞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특이한 인터뷰였다. 9월 말까지 엠바고(보도 유예)와 사진촬영 금지라는 조건이 붙었다. 존 레넌의 70회 생일(10월 9일)에 맞춰 기획된 새 추모 앨범의 출시에 맞춰달라는 요청이었다. 오노는 이 앨범에 수록될 노래 선정과 곡 보정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인터뷰 석상에서 사진을 못 찍게 한 것은 오노 스스로 이미지 관리를 하겠다는 의도로 읽혔다. 대신 따로 사진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석 달 후 보도라니! 당혹스러운 조건이었지만 결국 오케이했다. 인터뷰를 안 하기로 유명한 오노다. 게다가 한국, 아니 아시아 언론으론 j가 단독으로 초청받았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열두어 곳의 미디어만 참여한 인터뷰다.



j를 선택한 오노에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말할지언정 “노”할 이유란 없었다.






j BEATLES >> 비틀스 그 신화의 역사



도전과 노력, 그리고 성취. 사람들의 화합과 반목. 비틀스의 역사는 ‘휴먼 드라마’였다. 『THE COMPLETE Beatles CHRONICLE』(마크 루이슨 著, 생각의 나무)를 중심으로 비틀스라 불린 사람들의 발자취를 되짚어 봤다.



정리=김준술 기자



56년 5월 17파운드짜리 기타로 출발. 영국 리버풀의 평온한 마을에 살던 16세의 존 레넌은 엘비스 프레슬리가 부른 ‘상심의 호텔(Heartbreak Hotel)’이 가진 힘과 우아함에 매료됐다. 이어 그룹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처음에 그가 심취한 음악은 대유행하던 ‘스키플(Skiffle)’. 미국 흑인 재즈와 민속음악을 접붙인 장르였다. 처음엔 그룹명이 ‘블랙 잭스’였다. 레넌은 얼마 뒤 다니던 고교 이름을 본떠 ‘쿼리 멘’으로 밴드명을 바꿨다. 즐기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 그게 비틀스의 뿌리였다.



57년 7월 6일 교회의 운명적 조우. 쿼리 멘 밴드는 리버풀 울튼의 ‘성(聖) 피터’ 교회에서 여름축제 연주를 했다. 그 공연을 15세 소년 폴 매카트니가 지켜 보고 있었다. 재즈 음악가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는 평소 기타에 매료됐었다. 이날 공연 뒤 그는 레논이 흥얼거리며 좋아하던 노래 2곡의 가사를 적어 건네며, 기타를 조율하는 기술도 보여줬다. 두 거인(巨人)이 처음 만난 역사적 순간이었다. 레넌은 매카트니의 재능에 홀딱 반했다. 고심 끝에 자신의 위치가 위협받는 걸 감수하고 영입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매카트니도 흔쾌히 수락했다. 우연을 운명으로 만든 건 사람의 선택이었다.



58년 2월 6일 어린애 취급받던 해리슨. 레넌은 쿼리 뱅크 고교를 졸업하고 리버풀 예술대에 들어갔다. 밴드는 계속 꾸려갔다. 멤버들은 리버풀의 윌슨 홀에서 15세의 어린 기타리스트 조지 해리슨을 만났다. 손가락이 부러지도록 연습해 출중한 실력을 갖춘 소년이었다. 그는 “두 살 반 나이 차는 무시할 수 없다”며 형들에게 무시당했지만, 공연을 따라다니는 끈기로 결국 공식 멤버가 됐다.



쿼리 멘 밴드 시절의 존 레넌.
59년 여관비 없어 결승무대 포기. 쿼리 멘은 데모 음반을 만들었지만 TV 오디션에서 탈락한 뒤 목적 없이 방황했다. 드럼 주자인 콜린 핸튼이 멤버들과 심각한 말싸움 끝에 버스 정거장에서 드럼을 갖고 내려 버렸다. 조지 해리슨마저 다른 그룹과 자주 연주했다. 다행히 그해 가을 신인 발굴 무대에 나가 마지막 관문까지 나갈 기회를 얻었다. 우승자는 ‘관객 박수’ 소리로 가릴 참이었다. 하지만 맨체스터에서 하룻밤 묵을 돈이 없던 밴드는 결승을 포기하고 낙향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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