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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칼럼] ‘독가스 과학자’ 프리츠 하버(8)

“I know not with what weapons World War III will be fought, but World War IV will be fought with sticks and stones. (만약) 3차 대전이 일어나면 어떤 무기를 갖고 싸우게 될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4차 대전이 일어난다면 그 때는 막대기와 돌로 싸우게 될 것이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위험한 과학, 위험한 과학자(12)

죽여야만 살고 살기 위해서는 죽여야만 하는 잔인한 전쟁에서 도덕과 윤리가 존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전쟁을 뒷받침하는 과학기술에도 도덕과 윤리가 존재할 수 있을까?



독가스는 다시 독가스 개발을 불러



천재 화학자 하버가 개발한 독가스는 훗날 아우슈비츠와 같은 강제수용소에서 유대인을 비롯해 이민족을 말살시키는 효과적인 무기로 쓰인다. 하버는 위험한 천재의 상징으로 취급된다.
아마 창과 칼을 갖고 싸우던 시대에는 없었는지 모른다. 총과 포탄의 시대에는 있다. 문명의 진보를 통해 개방된 사회에서는 분명 있다. 그것은 전쟁 당사자의 양심이 아니라 국제사회가 바라보는 눈과 여론이다. 그리고 국제 규약과 협정이 있다.



예상대로 전쟁무기로 사용된 최초의 독가스는 상대를 격분시켰다. 독일의 가스공격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자 영국군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영국군 군사령관 존 프렌치 경은 “독일과 비슷한 수단을 제공하기 위해 우리도 즉각적인 조치를 해야 한다”며 독가스 개발을 명령했다. 피가 피를 부를 부르는 가스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1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일과 영국 양측은 22가지 화학무기를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형태도 다양했다. 폭탄, 수류탄, 때로는 공중 폭격을 통해 화학공격을 시도했다. 화학물질도 사람의 폐뿐만 아니라 피부에 침투하거나 혈액에 독을 퍼뜨리게 하는 갖가지 방법이 시도되었다.



하버의 독가스는 커다란 역할을 하지 못해



그러나 하버가 의도한 것만큼 독가스가 그렇게 커다란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가스전은 풍향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군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다.



이프로 전투에서는 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연합군과 독일군과 전투가 치열했던 플랑드르(Flanders)에서는 바람이 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독일군 진지로 불어오기 때문에 독일 군부대 조차 독가스 사용을 반대했다. 또한 전선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독일 장군들도 독가스 사용을 반대했다.



독일 제3군 최고 사령관인 카를 폰 아이넴 장군은 1917년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독가스도 그렇고, 그것을 배치한다는 것이 정말 짜증날 정도라오. 맨 처음부터 나는 가스무기에 구역질이 났소”



그는 계속해서 가스무기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가스무기는 기사도 정신과는 정말 거리가 먼 무기라오. 비겁하게 뒤에서 공격해야 하오. 아마 범법자나 쓸법한 무가가 아닌가 생각하오….”



독일 장성 가운데도 독가스 사용 반대 많아



독일군 내부에서도 독가스 사용반대를 주장한 지휘관들이 있었다. 독일 3군 사령관 칼 폰 아이넘 장군은 독가스가 기사도 정신에 위배된다며 불쾌감을 드러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제6군 사령관이며 독일 바이에른의 황태자 루프레히트도 가스 공격이 막 시작된 1915년 일기에 이렇게 썼다.



“솔직히 말해서 새로운 가스무기 사용에 동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큰 실수라고 생각한다. 만약 독가스가 효과적인 무기라는 것이 입증된다면 적들도 똑 같은 방식을 채택할 것이 분명하다. 바람의 방향을 고려해 그들은 우리가 방출한 가스 보다 10배 이상을 우리에게 보낼 것이다” –히틀러의 과학자들에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버가 고안해 낸 독가스가 다른 사람들이 전혀 개발할 수 없는 최첨단 무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어느 정도 노력하면 연합군 측에서도 충분히 그에 상응하는 독가스를 개발할 수 있는 그러한 무기였다는 것이다.



과학자 신분에서 바로 대위로 진급



이프로 전투가 있고 나서 하버는 가족을 방문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5월1일 그는 집에 친구들을 불로 파티를 열었다. 친구들은 독가스 공격으로 이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다며 하버를 칭찬했다. 그러나 하버는 별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한방에 날려보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 파티는 과학자로써는 전례가 없던 영광인 대위승진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그는 이프로 전투에서 세운 혁혁한 전공으로 과학자라는 직위에서 바로 단숨에 대위 계급장을 달게 되었다. 물론 그의 계급은 일반 대위와는 전혀 차원이 달랐다.



바로 그날 밤 독일 여성 가운데 몇몇 안 되는 화학박사 학위 소유자인 하버의 아내 클라라는 권총을 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공중에다 한방을 쏜 뒤 자신의 가슴에 발사했다. 두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아들 품에 안겨 죽었다. 훗날 아들도 어머니 뒤를 따라 자살을 선택한다.



이프로 전투 승리 축하 파티에서 아내 권총 자살



하버의 아내가 독가스 전쟁이 시발점이 된 남편의 행동에 저항하는 의미로 자살했다는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몇 년간이나 계속되었다. 하버가 수개월간 염소를 이용한 공격을 계획하고 있을 때 아내 클라라가 강력하게 반대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아내가 죽은 바로 그 다음날 하버는 동부전선으로 향했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에 대한 적개심을 표시라도 하는 듯 선두에 서서 러시아 군대를 향해 무자비한 가스공격을 지휘했다. 독가스 과학자가 느낀 분노를 삭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는지 모른다. (계속)



김형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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