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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일본·명에서 첨단 무기와 기술 빼내려 애썼던 류성룡

 
  포르투갈을 통해 명나라에 들어간 불랑기포(사진 위)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에도 전해졌다. 15세기 말 유럽에서 처음 제작된 조총(사진 아래)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에 공포의 대상이었다. 임진왜란 2년 전인 1590년 일본 사신이 선조에게 조총을 진상한 적이 있었으나 조선은 이를 활용하지 못하고 사장시켰다.
 
1543년 일본 규슈 남쪽의 다네가시마(種子島)란 섬에 중국 선박 한 척이 표착했다. 배에는 포르투갈 상인이 타고 있었다. 그는 다네가시마 영주에게 소총 한 자루를 선물했다. 뎃포(鐵砲)라 불렸던 조총(鳥銃)이 일본에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조총은 곧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마침 일본은 중앙의 막부 정권이 힘을 잃고 지방의 영주들이 패권 경쟁을 벌이던 전국(戰國)시대를 맞고 있었다. 패권을 열망했던 오다 노부나가는 조총을 확보하고 활용하는 데 특히 열심이었다. 그는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 가쓰요리에게 대승을 거두어 전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다. 나가시노 전투는 조총을 중시했던 노부나가가 상대적으로 그것을 경시했던 가쓰요리를 압도했던 싸움이었다. 말하자면 뎃포와 무뎃포(無鐵砲)의 대결에서 ‘무뎃포’가 참패했던 전투이기도 했다.

이윽고 뎃포와 무뎃포의 대결은 1592년 조선에서 재현되었다. 임진왜란 초반 조선 육군은 조총의 위력 앞에서 혼비백산했다. 개전한 지 불과 17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선조가 피란길에 오르는 치욕을 겪었다. 조선 육군이 조총에 맞서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것은 명군이 들어오면서부터였다. 1593년 1월, 평양 전투에서 명군은 불랑기포(佛狼機砲)를 비롯한 다양한 화포를 발사하여 일본군의 넋을 빼놓았다. 화포의 위력에 눌린 일본군은 평양에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도체찰사로서 조선군을 지휘했던 류성룡(柳成龍)은 조총과 화포를 확보하고 관련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는 사로잡거나 투항해 온 일본군을 통해 조총 관련 기술을 익히고 명군 장수들을 통해 화포와 화약 기술을 습득하려고 했다. 또 훈련도감을 만들어 전문 화기수를 육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화포와 화약 관련 기예를 습득하는 것은 여의치 않았다. 명군은 화포나 염초(화약 원료) 제조법이 유출되는 것을 집요하게 막으려 했다. 심지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사람을 보내 조선 각지에 남아 있던 화기들을 일일이 회수해 갔다.

오늘날에도 강대국들은 첨단 무기나 관련 기술을 다른 나라에 넘겨주려 하지 않는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다면 스스로 개발하는 수밖에 없다. 근래 우리나라도 제법 다양한 무기들을 자체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생각하면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최근 자체 개발한 ‘명품 무기’라고 자랑했던 K-1 전차, K-21 장갑차, K-9 자주포 등의 결함이 줄줄이 드러나 빈축을 사고 있다. ‘명품’을 개발했다고 자랑하기에 앞서 개발 이후 성능과 품질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제대로 했는지부터 철저히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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