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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74) 부하를 다루는 방법

부하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는 전선의 지휘관들이 늘 고민해야 하는 대목이다. 무리한 명령을 내리고 그를 수행하지 못해 쩔쩔매는 부하를 궁지로 몰아가는 지휘관은 결코 A급이라고 할 수 없다. 내리는 명령이 정확하고 이치에 맞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 지휘를 따르는 부하들의 행동이 분명해진다.



“이번에 또 놓치면 넌 끝장이다”
다급해진 전부일 대령이 꾀를 냈다
F-86 ‘쌕쌕이’ 띄우고, 경찰 부르고…
마침내 빨치산 주력 명줄을 끊었다

그러나 다급한 상황이었다.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전부일 대령이 결코 게으름을 피우다가 적을 놓쳤다고는 보지 않았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현지 산세를 잘 알면서 더구나 어두운 밤을 이용해 움직이는 빨치산 주력에 어쩔 수 없이 당했다고 봐야 했다.



그럼에도 나는 엄하게 그를 다그쳤다. 지금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적 주력을 따라잡아야 하는 정신력의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회고에서도 드러나지만 나는 전부일 대령에게 가혹한 주문을 했다. 그는 당시의 내가 “탈출한 적들이 지리산으로 잠입하기 위해 순창 고개 쪽으로 달아나고 있으니 30분 내에 따라가 잡으라. 이번에도 놓치면 너는 끝장이다”고 일갈했다고 적었다.



그 회고가 맞다. 나는 전부일 대령이 더 정신력을 발휘해 재빠르게 기동하는 빨치산을 따라잡도록 했다. 아주 엄한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나는 가혹하고 야멸차게 그를 꾸짖었지만, 이는 그가 분발해 어떻게 해서든지 빨치산 주력을 따라잡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추상 같은 내 명령에 무조건 “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담양에서 순창까지는 꽤 먼 거리였다. 20㎞는 채 안 되지만 당시의 도로 사정을 감안할 때 30분 내에 도망치는 빨치산 주력을 잡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궁(窮)하면 통(通)하는 법이다. 극한의 상황에서 그를 돌파하기 위해 노심초사(勞心焦思)를 거듭하다 보면 뭔가 달리 방법이 떠오르는 수가 있는 것이다. 전부일 대령은 온갖 궁리를 다했던 모양이다. 결국 그는 적들이 다가가고 있는 순창의 경찰서장에게 전화를 걸어 적의 예상 퇴주로에 경찰 저지 병력이 깔려 있는지를 물었다. 경찰서장은 “마침 경찰 부대를 그쪽에 배치해 두고 있다”고 대답했다.



전부일 대령이 차량 편으로 부대를 이끌고 부리나케 그곳으로 달려가자 이미 경찰 저지 병력과 빨치산 주력부대가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전 대령이 이끄는 지원부대가 후방에서 다가가자 빨치산은 경찰 저지선을 뚫지 못한 채 서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6·25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1950년대 초반 수원 비행장에서 미군의 F-51 전투기들이 정비를 받고 있다. 지리산 빨치산 토벌을 위해 1951년 12월 공세에 들어간 ‘백 야전전투사령부’는 경남 사천의 공군 기지에서 발진한 F-51 전투기의 지원을 받아 공중과 지상의 합동 작전을 효과적으로 펼쳤다. [미 국방부 자료]


전부일(1924~2004)
전 대령은 급히 공중연락 장교를 통해 공군의 지원을 요청했고, 때맞춰 출격한 F-51 한국 공군기들이 빨치산 부대를 맹폭하기 시작했다. 한 번 놓쳤지만 강한 정신력으로 적 주력을 끝까지 추격한 전부일 대령의 부대는 대승을 거뒀다. 공군 폭격에 퇴로가 막힌 빨치산은 전 대령의 부대와 경찰 부대를 상대로 힘겹게 싸움을 벌이다가 결국 대패하고 말았다.



수도사단과 8사단은 공교롭게도 먼저 적 주력을 놓친 뒤 바로 부대 전력을 수습해 끝까지 추격전을 펼치면서 적을 분쇄하는 경험을 쌓았다. 수도사단은 일단 적 주력이 아군의 전투 지경선을 교묘히 돌파하는 것을 허용한 뒤 사단장이 직접 비행기에 올라타 독전(督戰)을 거듭하면서 적을 추격했다. 그런 수도사단도 21일 일부 병력을 장안산에 남긴 채 주공(主攻)을 남동쪽으로 돌려 끝까지 빨치산의 뒤를 쫓아 가다가 23일 성수산 부근에서 그들을 대파했다.



수도사단은 그러나 23일 밤 포위망을 한 번 더 뚫리고 말았다. 그에 따라 수도사단은 24일부터 운장산에 남아 있던 병력까지 차량으로 이동시켜 장안산을 겹겹이 에워싼 뒤 28일까지 닷새 동안 치열한 공격을 퍼부었다.



수도사단은 이 끈질긴 추격전을 통해 790명을 사살하고 478명을 생포했다. 수도사단 부대원도 29명이 전사하고, 29명이 다쳤다. 그러나 이 추격전은 빨치산 주력의 명맥(命脈)을 끊었던 결정적인 일격이었다. 그러나 방준표 당시 도당 위원장이나 도당의 보위사단장 맹봉, 45사단장 황의지 등 핵심 간부들을 잡는 데는 실패했다.



8사단도 회문산 일대를 공격한 뒤 다시 내장산에 숨어 들어간 빨치산 토벌에 나섰다. 저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치열한 반격을 펼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추위와 허기에 지쳐 싸움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귀순자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27일까지 이어진 회문산과 내장산 일대 토벌 작전에서 8사단은 39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빨치산 417명을 사살하고 851명을 생포하는 큰 성과를 거뒀다.



우리의 예비 부대에 해당하는 서남지구 사령부의 3개 연대 또한 수도사단과 8사단이 운장산과 회문산 일대를 토벌하는 때에 맞춰 지리산으로 다시 숨어들려고 이동하는 빨치산을 잘 막았다. 101, 117 예비연대와 제200 경찰연대는 통합적인 작전을 펼치면서 지리산 주변을 떠돌던 81, 92사단과 이영회가 이끄는 57사단 빨치산 부대를 더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110연대 제3대대는 19일 반야봉 동쪽에서 빨치산 50명을 발견해 전멸시켰고, 경찰 200연대 또한 거림 부근에서 같은 날 재집결을 노리고 산에 들었던 빨치산 150명을 격퇴했다. 117연대는 21일 노고단에서 빨치산 33명을 생포해 끌고 오기도 했다.



적은 잘 숨어 다녔지만 이제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강력한 정신력으로 무장한 토벌대가 위력적인 수색을 펼치면서 이제 더 이상 숨을 곳도 없었다. 날씨는 더 추워지고 있었으며 눈도 자주 내렸다. 이제는 마지막 몰이에 나설 때가 된 것이다. 제2기 전반기 작전은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제는 후반기 작전에 들어설 때였다.



토벌대는 쉴 틈이 없었다. 수도사단은 31일 덕유산과 민주지산 포위 공격에 들어갔고, 8사단은 16, 21 두 개 연대를 남하시켜 전남 도당이 집결한 것으로 보이는 화순의 백아산 일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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