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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일제의 쌀 반출로 더욱 간절해진 ‘이밥’에 대한 열망

 
  쌀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군산항(1920년대 엽서에 실린 사진). 일본이 조선쌀을 다량 반출해 감에 따라 한국인의 쌀 소비는 크게 줄었다. 더불어 쌀에 대한 갈망도, 쌀밥에 붙은 귀하고 신성한 음식이라는 이미지도 훨씬 강화됐다. 이 시절 ‘쌀밥을 먹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과 동의어였다.
 
쌀은 밀·옥수수와 더불어 세계 3대 곡물로 꼽힌다. 전 세계 경지 면적의 약 20%가 논이며, 세계 총 농업생산고의 약 26%가 쌀이다. 쌀은 인구 부양력이 특히 커 쌀을 주식으로 하는 지역은 어디나 인구 밀도가 높다. 밀은 경작 면적에서 32%로 1위지만 전 세계 인구의 10% 정도만이 주식으로 삼는 데 비해 쌀을 주식으로 하는 인구는 35%에 달한다.

쌀 경작은 적도 부근의 아시아에서 기원했고, 지금도 전 세계 쌀의 90%가 이 지역에서 생산된다. 우리나라는 쌀 생산 지대의 맨 북쪽에 해당한다. 한반도 사람들이 쌀을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000년께였고, 쌀을 주식으로 삼은 것은 그로부터 1000여 년 뒤였다. 그런데 한반도는 벼농사에 적합한 곳은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여름이 짧고 강수량이 적은 데다 벼가 한창 생장할 5~6월에는 가물기 일쑤고, 수확을 앞둔 8~9월에는 수시로 태풍이 밀어 닥쳤다. 이런 악조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수리시설을 만들고 농법을 개선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으니, 이는 결과적으로 ‘문명의 발전’을 이끌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쌀은 ‘충족되지 않는 주곡(主穀)’이라는 모순된 지위를 얻었다. ‘귀한 곡식’을 주곡으로 삼은 것이 한국 식문화(食文化)의 한 특징이었다.

일제는 한국을 강점하자마자 ‘미작개량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농민들에게 일본인의 입맛에 맞는 벼를 재배하라고 강요했다. 헌병·경찰은 일본 품종을 심지 않은 논의 모종을 뽑아 버리기까지 했다. 그들에게 ‘조선 쌀’은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 소비자를 위해 필요했다. 조선 쌀의 상품 가치를 높이는 것은 지주들에게도 좋은 일이어서 ‘품종 변화’는 신속히 진행됐다. 이 땅에서 생산한 쌀은 일본으로 보내고 ‘잡곡’으로 연명하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쌀밥은 ‘이름뿐인 주식’이 되었다. 당시 대다수 사람의 첫째가는 소원은 “쌀밥 한 번 배불리 먹어 보는 것”이었다.

쌀밥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망이 수그러든 것은 1970년대 후반 이후였다. 다수확 품종이 개발되는 한편 식생활의 서구화가 진전된 때문이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1인당 쌀 소비량은 계속 하향 곡선을 그렸고, 이제는 주곡이라 하기에도 민망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쌀은 여전히 다른 모든 곡식을 뭉뚱그려 부르는 ‘잡곡’과 분명히 대비되며 쌀로 지은 밥과 쌀로 빚은 술은 제상에 올리는 ‘신성한 음식’이다.

이제는 쌀이 남아돌아 고민이지만, ‘귀하고 신성한 곡식’이라는 이미지는 요지부동이다. 쌀을 짐승에게 주겠다는 발상이 너무 낯선 소이(所以)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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