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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뇌졸중 수습 … 30년 ‘2인자 기질’ 몸에 배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당 대표자회 개막, 평양 신권력의 ‘키 맨’ 장성택

2002년 10월 29일 서울 삼성동 한국무역협회를 방문한 북한 경제시찰단. 앞줄 오른쪽부터 박남기 당시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단장·최근 사형당함), 장성택(당시 56세)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김희택 당 중앙위 제1부부장, 박봉주 화학공업상. [중앙포토]
“북한판 ‘김(金)&장(張) 시대’가 열린다.” 44년 만의 북한 당 대표자회를 앞두고 전문가들 사이에 유행한 말이다. 북한의 권력 후계 및 후견 구도가 가시화될 것이란 관측에서다. 김정일 위원장의 3남 김정은(28)과, 정은의 고모부, 즉 김 위원장의 여동생 김경희의 남편인 장성택(64)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겸 당 행정부장 얘기다. 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이 노동당 중앙위원(정원 150명)에 선출되거나 장성택이 서열 2위의 노동당 조직비서에 임명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실제 어떻게 되든 당 대표자회는 김 위원장의 건강 악화와 경제파탄, 천안함 이후 국제사회의 압박 등 대내외적으로 불안한 북한이 후계구도를 다지면서 국면 전환도 꾀할 계기로 활용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권력 형성기에 있는 김정은을 보좌해 북한호를 이끌 신권력의 ‘키 맨’ 장성택은 어떤 사람일까.



키 1m70㎝의 수줍은 미남형

2002년 10월 26일. 북한 경제시찰단 18명이 남한에 왔다. 7·1경제관리개선조치, 신의주 특구 지정 등 북한이 나름대로 개혁·개방 드라이브를 걸 때다. 시찰단은 11월 3일 돌아갈 때까지 서울의 지하철을 타 보고, 삼성전자와 코엑스몰, 지방 공장, 제주도를 방문했다. 시찰단에는 단장인 박남기 당시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김희택 당 중앙위 제1부부장, 박봉주 화학공업상, 송호경 조선 아·태위원회 부위원장 등 장관급 인사 5명이 포함됐다. 그러나 언론의 주목을 받은 이는 실세로 알려진 장성택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었다. 방문단의 ‘8박9일’ 남한 행사에 직간접으로 참여한 인사들을 만나 ‘인간 장성택’을 물어봤다. 그는 막강 권력을 가진 그러나 철저한 ‘2인자’였고 북한 개혁·개방의 필요성을 잘 아는 감각 있는 인물로 비춰졌다.

A씨에게 물었다.



-기질이나 성격은 어땠나.

“얌전하고 수줍어하는 편이었다. 사진 찍히는 것도 싫어했다. 키는 1m70㎝ 정도 미남형이었다. 당시 보도됐지만 기자들이 질문하면 ‘박남기 단장에게 물어보라’며 몸을 뺐다. 만찬장 헤드테이블에 앉아서도 거의 얘기를 하지 않았고 걸을 때도 단장 뒤 10m쯤 떨어져 걸어갔다. 2인자 기질이 몸에 밴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로 몸을 뺏지만 장의 실제 위상과 파워는 가려지지 않았다. A씨가 소개한 에피소드. “삼성전자를 방문했을 때다. 박남기 단장이 신용카드로 음료수를 사는 자동판매기 앞에 섰다. 처음 본 자판기. 더구나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시스템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박남기가 ‘물건을 산 사람이 나중에 돈을 안 내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으며 3~4분 지체했다. 뒤에 있던 장성택이 옆 수행원에게 “야, 그냥 가라 그래”라고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박 단장은 뒤로 한 번 고개를 돌려보더니 번개처럼 걷기 시작했다.”



또 다른 에피소드다.

“하루는 장성택이 술을 많이 마셨다. 아침 출발 시간에 박남기 이하 모든 시찰단이 양복을 입고 복도에서 기다렸는데 출발 시간 한 시간이 넘도록 아무도 문을 못 두드렸다. 자기들끼리 자유롭게 얘기하고 있다 장성택의 방문이 열리자 전원 기립자세로 벽에 붙어 섰다. ‘세긴 세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권위를 세우진 않았다. 농담을 툭툭 던졌다. B씨의 얘기다. “수행원 중 한 명이 서 있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운동을 했다. 장성택이 지나가더니 ‘그 잘난 척하지 마라. 남들이 보면 니가 제일 높은 놈인 줄 알겠다’고 했다. 노래방에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노래 그만하라. 연습 좀 더하고 할 것이지’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장성택을 개혁·개방 지향론자라고들 하는데.

“동의한다. 북한 대표단들, 특히 장성택은 한국개발연구원(KDI)에 관심이 많았다. ‘북한에도 KDI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누군가 했다. 장성택은 ‘우리도 장군님이 2년 전에 만들라고 했는데, 내각 안에 경제연구소를 좀 작게 만들었다. 연구원이 60명 정도 있다’는 얘기를 했다. 나중에 장성택이 김중수(현 한은 총재) 당시 KDI 원장을 두세차례 만찬장에서 만났지만 따로 만나고 싶다고 요청해 두 사람이 사찰 마지막 행선지인 제주도에서 독대한 적도 있다.”



국정원 3차장 출신인 통일연구원의 한기범 객원연구위원은 “장성택이 신의주 행정 특구에도 깊이 관여했다”고 했다. 어우야 그룹 양빈 총재를 만난 뒤 김정일에게 “양빈이 ‘신의주를 내주면 국제적 경제특구로 만들어 주겠다’고 한다”는 건의를 했다는 것이다. 다른 소식통은 “양빈을 접촉하기 전 북측은 우리 정부에 신의주 특구 책임자로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는데, 그걸 요구한 사람이 장성택이었다”고 했다. 그는 “장성택은 ‘김우중이 안 되면 다른 사람이라도 보내달라’고 했는데 우리 정부는 실정법 위반과 남한 내 정서 등을 고려해 거절했다”고 전했다.



북한판 KDI 설립에 큰 관심

장성택은 김 위원장의 친동생 김경희와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에서 만났다. 평범한 집안 출신이라 고 김일성 주석의 반대가 심했지만 이를 극복하고 1972년 결혼했다.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온 뒤 88년 노동당 청소년사업부 부장으로 권력에 들어왔다. 95년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 되면서 승승장구했고 ‘권력 2인자’란 말이 나왔다.



그가 실각한 것은 공교롭게도 남한을 다녀온 뒤다. 2003년 7월 김 위원장의 자강도 현지시찰 수행 이후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는 2006년 1월 당 근로단체 및 수도건설부 제1부부장으로 복귀할 때까지 2년간 지방에 유배돼 ‘혁명화’ 과정을 거쳤다.

실각 이유에 대해 여러 얘기가 있다. 한국으로 망명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2003년 7월 국회에 출석, “유사시 김정일을 대체할 유력한 인물”이라고 했기 때문이란 얘기와 측근의 호화 결혼 사실이 드러난 게 계기가 됐다는 말도 있다. 서울에 왔을 때 “자본주의 문화를 맛보자”며 룸살롱에 간 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2005년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특사로 평양에 갔을 때 장의 안부를 묻자 김 위원장은 “남쪽에 가서 폭탄주도 배우고 해서, 아파서 쉬게 했다”고 웃으며 대답했기 때문이다.



한기범 위원은 “분파 행위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2003년 12월 김 위원장의 위임에 따라 경제개혁 조치를 이끌던 박봉주 당시 내각 총리가 신일남 수도건설위원장에게 ‘평양시의 현대화 사업에 필요한 자재를 우선 공급하라’고 지시했는데 신일남이 ‘장성택 부부장의 승인이 필요하다’며 거부했다. 박 총리가 내각 인사들이 장성택의 의견을 추종하는 사례를 수차례 찾아내 김 위원장에게 보고했고, 김 위원장은 강도 높은 검열을 했다”고 했다. 2004년 장성택은 ‘종파주의와 권력 남용 혐의’로 신일남 등 측근 수십 명과 함께 실각했다.



한 위원은 2004년 4월 김 위원장이 군 고위 간부를 모아놓고 한 언급을 소개했다. “지난 시기 반당혁명분자들은 다 동상이몽하는 자들이었다. 겉으로는 당의 노선과 정책을 지지하는 척하지만 속으론 반대한다. 도적고양이처럼 숨어다니며 쏠라닥질(못되게 쑤근거림)했다. 그가 누구든 강한 투쟁을 벌여 머리를 들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장성택의 분파 행위를 지적한 얘기라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2006년 1월 장성택을 당 근로단체 및 수도건설부 제1부부장으로 복권시키고 파티를 성대히 열어 위로해줬다고 한다. 한 위원은 “현지 지도도 함께 다니며 위로도 해주고 충성심을 체크했다”고 했다. 장에게 실어준 힘은 2008년 8월 뇌졸중 이후 더 커졌다. 뒷수습하는 것을 보며 장성택을 믿고 의지할 인물로 신임하게 됐다는 것이다. 2006년 복귀한 장성택은 지난해 4월 국방위원회 위원(당행정부장 겸임)으로 승진했다. 그해 4월의 헌법 개정과 국방위 조직 정비는 장성택이 실질적으로 국정을 총괄하면서 김정은을 지원하는 제도적 체제를 갖췄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장성택 복권의 공신은 김경희다. 오빠 김정일 위원장에게 적극적으로 설득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면 장성택과 김경희의 부부 사이는 어떨까. 북한 소식통들은 “남남이나 다름없는 관계”라고 한다. 아예 남이 되면 둘 다 권력에 손상을 입게 되고 합치면 시너지효과가 나기 때문에 같이 있다는 것이다. 김경희는 2008년 8월 오빠가 쓰러지기 전까지 알코올 중독이었고 젊었을 때는 김용순 비서(2006년 사망)와의 스캔들로 불편한 관계였다고 한다. 최근 암을 앓았으나 완치됐다고 한다. 김경희 역시 당경공업부장으로 복귀해 오빠 주변에 계속 머물고 있다. 두 사람의 딸 금송은 2003년 8월 프랑스 유학 중 본국 소환령을 받고 고민하다 술을 마시고 수면제를 과다 복용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 ‘김&장 시대’에 들어선 북한은 개혁·개방 드라이브를 걸 것인가.

조동호 교수는 “2002년 경제시찰단의 실질적인 단장은 장성택이었고 그 인사들이 개혁·개방을 준비하는 모임이 아니었나 생각한다”며 “장은 나름대로 북한이 어떻게 가야 살아날지 아는 인물로 이른바 ‘김&장 시대’가 되면 북한이 개혁·개방으로 나오는 추진체 역할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봉조 전 차관도 “장성택은 중국의 개혁과 한국의 발전을 파악한, 드물게 현장을 본 인물”이라며 “‘북한식 경제발전 태스크 포스’ 팀을 맡아본 경험이 있어 당대표자회 이후 뭔가 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또 “김일성 탄생 100주년, 2012년 강성대국 완성을 목표로 설정해놓고 후계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미국과 중국·한국을 향해 관계 개선의 손을 내밀 것”이라고 전망했다. 아울러 “지난주 김 위원장의 방중을 계기로 중국과 북한이 과거처럼 선심성 협력이 아닌 동북 3성을 무대로 실질적 지역 경제협력을 추진해 나갈 것이란 점도 주목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기범 위원은 신중한 진단을 했다. 장성택이 개혁·개방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권력에서 살아남는 이치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개혁·개방에 나서더라도 ‘김정일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할 것이란 얘기다. 그는 “장은 개혁·개방 성향을 지녔지만 보신의 귀재다. 2004년 종파사건의 쓰라린 경험도 있다. 후계 안정을 위해 대외관계를 유화적으로는 풀어가겠지만 우선은 체제 단속을 위해 시장통제 등 보수적 조치에 충실할 것”이라고 봤다. “장성택은 김정일의 맏아들 김정남과 가깝다. 하지만 후계로 굳어진 김정은을 진심으로 서포트할 것이고 그래야 통치의 정당성 확보에도 이롭다고 생각할 것이다. 정은을 도우며 자기 권력을 늘려나가는 게 좋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했다.



김수정 기자





*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는 당시 제주도에서 장성택과 독대는 한 사실이 없다고 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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