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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70) 대민(對民) 군기를 다시 세우다

‘백 야전전투사령부’가 1951년 말 빨치산 토벌을 위해 세운 작전계획은 빨치산이 몰려 있는 지리산 일대를 남과 북으로 나눠 압박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1기 작전의 핵심 내용이다. 이어 작전 구역을 동서(東西)로 나눠 빨치산을 토벌하는 2기 작전이 이어졌다. 우리는 1기 작전에서 많은 빨치산이 지리산을 빠져나가 주변의 다른 산으로 도주하리라고 애초부터 예상했다. 1기 작전에서 빨치산을 모두 소탕하는 게 가장 바람직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에 지나지 않았다. 경험이 많은 빨치산 주력부대는 토벌대의 틈을 노려 지리산 일대를 빠져나와 인근의 험준한 산악 지역에 몸을 숨겼던 것이다.



지리산 밖으로 도주한 빨치산
예전엔 부잣집 골라 ‘보급 투쟁’
토벌 쫓기자 닥치는 대로 털어
그들은 좀도둑과 다름없었다

2기 작전은 지리산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1기에 비해 작전 지역을 더욱 광역(廣域)으로 넓히되, 구역을 동과 서로 나눴다. 2기 작전은 12월 16일 시작해 이듬해인 1952년 1월 4일까지 펼쳐졌다. 1기 작전을 시작할 때와는 달리 토벌대에는 제법 믿을 만한 정보들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꾸준한 선무공작을 펼침으로써 주민들이 눈에 띄게 토벌대에 협력하는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토벌대를 보고 있었다. 산간(山間) 마을 주민들은 그 전까지 토벌대와 빨치산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면서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군이나 경찰로 이뤄진 토벌대의 작전은 일시적이었다. 한 번씩 마을에 나타나 빨치산을 잡는다면서 가옥을 태워 버리거나 부역자를 색출해 보복을 가하는 일이 숱하게 벌어졌다. 그러나 그런 작전이 끝난 뒤에는 다시 빨치산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빨치산은 그들 나름대로 군과 경찰에 협력한 사람들을 보복 학살하거나 곡식과 가축을 빼앗아 갔다.



1952년 5월 광주 빨치산 포로수용소의 모습. ‘백 야전전투사령부’는 빨치산 토벌에 착수하기 전 광주와 남원에 포로수용소를 먼저 세웠다. 토벌이 진행되면서 많은 빨치산이 붙잡혀 왔다. 종군작가 고 이경모씨의 작품으로 『격동기의 현장』(눈빛)에 실린 사진이다.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군대와 경찰에 함부로 협력할 수 없었다. 일시적인 작전만을 펼치는 토벌대를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 야전전투사령부’의 토벌은 뿌리를 뽑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민들이 자진해서 빨치산 정보를 흘려주는 경우가 많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리산은 덩치가 크고 깊지만 그 안에 사는 주민은 많지 않았다. 지리산 주변의 산악 지역에 숨은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한 2기 작전은 지리산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주민과 상대해야 했다. 따라서 대민(對民) 군기를 거듭 세우는 작업이 필요했다.



1기 작전과 마찬가지로 나는 민간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하는 데 상당한 신경을 썼다. 나는 토벌대에 작전 중 주민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숙영(宿營)하지 않도록 지시했다. 쓸데없이 민폐(民弊)를 끼치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부대가 사용하고 남는 식량을 주민들에게 나눠주도록 지시했다. 토벌대에는 당시 충분한 보급이 이뤄지고 있었다. 먹고 남는 식량 또는 일반 소모품을 주민들에게 나눠주도록 함으로써 민심을 얻을 수 있게 한 것이다.



불필요한 살생(殺生)도 1기와 마찬가지로 최대한 금지했다. 빨치산을 공격할 때에도 되도록 그들의 목숨은 살리도록 했다. 전투 중에 잡은 포로들을 최대한 수용소로 보내 심문을 받도록 했다.



게릴라를 상대로 싸우는 전투의 가장 큰 걸림돌은 주민이었다. 게릴라의 보급과 화력, 그리고 병력은 제한적이었다. 그들은 늘 주민들을 방패 삼아 나오게 마련이다. 토벌하는 입장에서 보면 게릴라보다는 주민을 상대하는 게 훨씬 어렵다. 그들과 협조 관계를 이루지 못한다면 게릴라를 발본색원(拔本塞源)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나는 2기 작전에 들어가면서 주민들을 소개(疏開)하는 데에도 신중을 기했다.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을 다른 곳에 옮기는 작업이었다. 적들의 보급선을 끊어 궁지로 몰아가는 방법이었지만 사는 장소를 옮겨야 했던 주민들은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나는 이들을 작전 지역의 반경 4㎞ 안에 있는 다른 마을에 거주토록 조치했다. 수용시설이 별도로 없는 경우에는 임시로 초막을 짓거나 천막을 만들어 제공했다. 이들이 머무는 마을을 흔히 ‘전략촌(戰略村)’이라고 불렀는데, 나는 그곳 주위에 울타리를 친 뒤 군대와 경찰이 지키도록 했다. 그들은 낮이면 전략촌을 나와 자신의 논밭에서 농사를 지은 뒤 밤에는 다시 돌아갔다.



빨치산과의 접촉을 막으면서 그들의 식량 보급선을 끊고, 나아가 먹을 것이 없어서 빨치산에 합류해 버리는 주민들의 입산(入山) 여지를 아예 없앤 것이다. 주민들 중 전략촌에 정착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자금을 지원해서 집을 짓도록 했다.



빨치산은 그 반대였다. 아지트를 떠나 다른 산간 지역으로 이동한 뒤 먹을 것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해의 추위도 모질었다. 따라서 빨치산들은 우선 생존을 위해서 눈에 띄는 대로 약탈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빨치산의 보급 투쟁은 비교적 잘 사는 사람을 상대로 행해졌다. 그러나 토벌대에 쫓기는 급박한 상황에서 주민들의 태도가 과거와 다르게 변하자 이들의 약탈 방식은 치졸해졌다. 주민들과 빨치산은 그 때문에 사이가 더 멀어지고 있었다. 주민들은 빨치산에 더 냉담해졌고, 빨치산은 그런 주민들에게는 약탈자 이상 또는 그 이하도 아닌 존재로 변해갔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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