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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62) 삐라 1000만 장

당시 남한 지역에서 활동했던 빨치산 숫자는 정확히 집계하기 힘들다. 그러나 추산(推算)해 보면 많게는 5만 명, 적게는 2만5000명 정도가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자체적인 무장(武裝) 외에, 북으로 갔다가 길이 막혀 되돌아오는 과정에서 유엔군이나 국군으로부터 노획한 무기, 그리고 북으로부터 전해 받은 화력 등을 갖추고 있었다.

내가 이끄는 ‘백 야전전투사령부’는 정규군 2개 사단에 예비 3개 연대, 전투경찰 3개 연대였다. 규모와 화력 면에서 적들에 비해 월등했다는 점은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적들은 깊은 산에 숨었다 느닷없는 기습을 펼치면서 출몰하고 있었다. 과거 빨치산, 즉 구(舊)빨치산의 노련한 게릴라 전술에다 신규로 가입한 북한군 정규군 병력, 남으로 침투한 북한 유격대가 한데 섞여 있었다. 결코 얕잡아볼 수 없는 상대였음은 물론이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양민(良民) 곁에 저들이 바짝 붙어 있다는 점이었다. 빨치산끼리만 모여 있다면 작전은 한결 쉽다. 폭풍처럼 덮쳐 강력한 화력으로 밀어붙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양민들이 저들과 함께 섞여 있을 때는 문제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작전을 과감하게 펼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작전의 가장 핵심적인 요건은 공비와 양민, 비민(匪民)을 제대로 구분해 주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적을 공격해야 하는 점이었다.

우리 전투사령부의 전체적인 작전계획은 제임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짰다. 나는 육군본부에 작전 투입 전투사단으로 정규 2개 사단을 요구했다. 동해안에서 내가 1군단장으로 있을 때 예하에 있었던 수도사단과 국군 11사단에 이어 한동안 호남지구 등에서 공비 토벌작전을 펼친 경험이 있던 8사단이었다.

밴플리트 8군 사령관은 그리스에서 현지 정부를 도와 반군 게릴라를 소탕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는 노련했다. 먼저, 그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밀어 버린 뒤 다시 동서로 구역을 나눠 작전을 펼치라”고 지시했다.

그에 맞춰 나는 강원도 동해안에 있던 수도사단에 상륙함 LST 편으로 마산과 여수에 상륙할 것을 지시했다. 그들은 마산과 여수에서 뭍으로 내린 뒤 북상하면서 지리산 남면(南面)에 포진토록 했다.

“귀순할 때는 무기를 등에 멘 채 두 손을 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쳐라.” 1951년 10월 지리산 빨치산 토벌을 시작하면서 백 야전전투사령부는 이처럼 귀순을 권고하는 내용이 담긴 ‘귀향증’ 등 1000만 장의 전단을 찍어 산에 뿌렸다. 오른쪽 사진은 전쟁 중 아군에 생포된 북한군. [백선엽 장군 제공]
8사단은 주둔지였던 양구에서 계속 남하해 지리산 북면(北面)에 포진토록 했다. 이들은 앞서 벌인 공비 토벌 작전에서 대민(對民) 선무(宣撫)공작을 훌륭하게 치렀던 부대였다. 일반 주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적절하게 공비 소탕작전을 벌여 상당한 명성을 쌓았던 부대였다.

이들의 이동은 비밀리에 이뤄졌다. 나 또한 사령부 본부 근무 요원들을 데리고 비밀리에 대구를 떠나 전주 북중학교에 도착했다. 전주 북중학교는 시내와 다소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일반인들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나는 공비와 양민을 가르는 작업에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양민 피해를 최대한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빨치산 안에는 수많은 양민이 섞여 있었다. 이념에 동조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끌려갔거나, 가족인 빨치산 구성원을 돌보기 위해 그들과 행동을 같이했던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이들을 우리가 싸움을 벌여야 할 빨치산과 격리해 대한민국의 품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게다가 지리산 주변에 살다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빨치산 뒤를 따라간 사람들도 구해 내야 했다.

나는 도쿄(東京)의 유엔군 총사령부에 부탁해 귀순을 촉구하는 내용 등이 들어간 전단지, 삐라 1000만 장을 찍도록 했다. 최초의 귀순증(歸順證)도 만들었다. ‘이 전단지를 들고 오면 받아준다’는 내용의 귀순 허가증이었던 셈인데, 나는 그곳에 내 이름이 새겨진 도장을 찍어 산에 뿌리도록 했다.

그리고 먼저 포로수용소를 만들었다. 남원과 광주에 대규모 포로를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었다. 포로수용소를 먼저 만든 뒤 이를 전단지 등을 통해 보여주면서 귀순 의사가 있는 빨치산들을 산에서 내려오도록 유도한, 심리전술이기도 했다.

방송팀도 데려왔다. 사령부는 전주 북중학교에서 일주일 정도 머물다 남원에 자리를 잡는데, 이곳에 도쿄의 유엔총사령부에서 방송팀을 데려다 선무 방송을 하도록 했다. 귀순 촉구 방송은 전파에 실려 지리산 깊은 산 속에 숨어 라디오를 듣던 빨치산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남원에 사령부 자리를 잡은 뒤에는 각자 기관에서 파견된 검찰과 경찰, 법원과 각 도 행정관이 모여 들었다. 귀순하는 빨치산을 즉석에서 처리하도록 행정과 법률적인 시스템을 갖춘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항은 ‘교전 외에는 절대 함부로 살상하지 말라’는 지침이었다. 나는 이를 철저히 지키도록 각 부대에 하달했다. 피의 보복이 계속 이어져가던 그 무렵의 빨치산과 좌익 처리 문제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는 개별적이면서 감정적인 보복을 끊어야 했다. 억울한 죽음을 막기 위해서는 가장 엄격하게 지켜야 할 지침이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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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