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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 오바마·푸틴까지 불러 모은 건반의 ‘수퍼 파워’ 랑랑

클래식 음악도, 피아니스트 랑랑(28)도 멀게 느끼는 사람에게 ‘랑랑 닷컴(www.langlang.com)’ 방문을 권한다. 경력(biography) 항목에 들어가 보자.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 영국의 퀸 엘리자베스 2세,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이 등장한다. 모두 랑랑의 청중이었다. 오프라 윈프리·제이 레노는 랑랑과 함께했던 방송인이다. 소니ㆍ아우디ㆍ아디다스ㆍ몽블랑도 이 사이트에 나온다. 랑랑을 후원하는 기업이다. 베르사체는 연주복을 협찬한다.



클래식 음악계의 콧대 또한 랑랑 앞에서는 그다지 높지 않다. 오스트리아 빈의 상징적 공연장인 무지크페어아인은 2009~2010 시즌에 ‘랑랑 페스티벌’을 기획했다. 독일의 자존심 센 피아노 제조사 스타인웨이는 2008년 ‘랑랑 스타인웨이’ 모델 다섯 종을 내놓았다. 특정 연주자의 이름을 딴 상품은 이 회사 150년 역사상 최초였다. 넘기고 넘겨도 끝없는 경력을 랑랑은 불과 10년 사이에 쌓았다.

이처럼 클래식 음악과 먼 사람에게도 랑랑은 가까이 있다. 세계의 대중문화와 올림픽 개막식까지 랑랑의 파워가 스며 있다. 중국은 베이징 올림픽과 상하이 엑스포에서 랑랑을 문화계 홍보 대사로 활용했다. 신흥 문화강국 중국에 랑랑만큼 ‘잘’ 치는 피아니스트는 많다. 그러나 아무도 랑랑만큼 논쟁적이 되지는 못한다. 왜일까.


“감사해요. 당신은 정말 쇼팽 매니어인 것 같군요.” “방콕에는 가능한 한 빨리 가서 연주하고 싶어요.”

최근 랑랑의 트위터(@lang_lang)에 올라온 답글 중 일부다. 그의 팔로어는 3500여 명. 즉 랑랑이 트위터로 올리는 글을 보는 사람의 숫자다. 그는 팔로어의 질문이나 감상평에 대부분 답장을 쓴다. 팬 관리가 철저하다.

지난달 전화 인터뷰에서 “트위터를 직접 하느냐”고 질문했다. “당연하다. 새로운 미디어로 만나는 청중이다. (기자에게) 당신의 아이디를 알려주면 지금 나와 트위터로 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거침없이 대답했다.

비판을 넘어

랑랑은 말하자면 ‘얼리 어답터’다. 예컨대 그는 아이패드용 애플리케이션(응용 프로그램) 제작에도 발 빠르게 참여했다. ‘매직 피아노(magic piano)’라는 애플리케이션이다. 전 세계 사용자와 함께 피아노를 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또 이달 새로 나온 자신의 앨범 ‘라이브 인 비엔나(Live in Vienna)’의 블루레이 버전에는 보너스로 3D 영상도 넣었다.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화면에서 손이 튀어나오고, 마치 코 앞에 건반이 있는 것 같은 영상을 만들었다. 올해 안으로 나올 쇼팽 관련 3D 애니메이션의 음악 감독도 맡았다.”

랑랑의 다양한 시도는 웅변한다. “지루한 음악은 반성하라”고. 무대 위에서도 랑랑의 연주 스타일은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다. 반듯하고 흐트러짐 없는 형식의 모차르트 소나타도 그 손끝에서는 대중음악 못지않게 구성진 멜로디가 된다. 음악의 굴곡을 확실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크게 연주하는 부분은 더 크게, 빠른 음악은 더 빠르게 친다. 음량이 작은 부분에서는 청중의 숨소리까지 느껴지도록 소리를 죽인다. 반짝이는 옷을 입고 무대에 나오고, 연주하면서 온몸으로 춤을 추기도 한다.

비판이 왜 없었으랴. ‘랑랑이 아니라 뱅뱅(Bang Bang·쾅쾅 친다는 뜻)’ ‘피아노 앞에 앉은 제니퍼 로페즈’ 등의 시기 어린 비난이 이어졌다. 그런 빈정대는 별명에 속이 시원해진 클래식 애호가도 꽤 됐다. 랑랑도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제 그다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여섯 살짜리 꼬마가 아니다”고 말했다. 나아가 “연주자가 정통성 있는 해석, 전통적인 수단에만 의존한다면 어떻게 더 많은 사람을 만나겠는가”라며 자신을 변호했다.

랑랑은 주변 시선에 개의치 않고 늘 새로운 영역으로 날아 다닌다. “번스타인과 카라얀은 당시에 생소하던 기술을 이용해 청중을 넓혀갔다. 번스타인은 영상물을, 카라얀은 CD를 적극 활용했다. 내가 최신 기술을 놓치지 않고 좇아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음악에 대한 진심만 가지고 가면 되는 것 아닌가.”

열망을 위해

만약 랑랑이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따라 컸다면 조금은 지루한 피아니스트가 됐을 수도 있다. 고향은 인구 350만의 도시 선양(瀋陽). 다섯 살에 이 지역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하지만 선양은 그를 알아보기에 좁은 도시였다. 여기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던 아버지는 일자리를 버리고 랑랑과 함께 미국으로 떠난다. 필라델피아의 명문 학교 커티스 음악원의 교수인 게리 그래프먼이 랑랑을 발탁했다.

음악원 입학 2년 후인 1999년은 랑랑에게 극적인 해다. 시카고 인근의 여름 음악축제인 라비니아 페스티벌에서 피아니스트 앙드레 와츠가 병으로 연주를 취소했다. 지휘자 크리스토퍼 에센바흐가 와츠를 대신할 연주자를 찾아 나섰다. 에센바흐가 그래프먼 교수에게 자문하면서 랑랑의 출세길이 열렸다.

이 무대의 차이콥스키의 협주곡 1번은 세계에 ‘랑랑 스타일’을 알린 첫 곡이 됐다. 이후 연주 제의가 잇따랐다. 랑랑은 베를린ㆍ빈 필하모닉은 물론 미국의 주요 오케스트라와 모두 협연한 최초의 중국인으로 기록됐다.

이렇듯 랑랑의 스타 탄생은 도전과 행운의 이중주곡이다. 특히 그는 인기를 유지·관리하는 데 영리하고 기민했다. 뉴욕 카네기홀 독주회의 앙코르에서는 중국 전통의상을 입고 나와 자국의 음악을 알렸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계처럼 완벽한 테크닉으로 유럽 음악의 성찬을 차려냈다. 서양인들에게 랑랑을 대신할 피아니스트는 없었다.

랑랑은 중국인들에게 ‘음악 영웅’이 됐다. 중국에서도 랑랑음악재단을 만들어 그를 뒷받침했다. 그는 재능 있는 어린이들을 골라 후원, 지도했고 미국 TV 쇼에도 함께 출연했다.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성화 봉송을 했고, 중국 쓰촨(四川)성 지진이 일어나자 뉴욕에서 모금 음악회를 열었다.

랑랑에게는 성공에 대한 열망이 있다. “선양에서 미국으로 다달이 생활비를 부치던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나는 하루 6~8시간 피아노를 쳐야 했다. 난방을 하지 못한 방에서 추위를 잊기 위해 연습했다.”

그의 자서전 『랑랑-피아노로 세상을 춤추게 하는』에 나온 대목이다. 연주 스타일에도 욕심이 배어 있다. 최근 앨범 ‘라이브 인 비엔나’의 베토벤ㆍ프로코피예프 또한 도전적이다. 편안히 휴식하며 들을 음악을 기대하긴 힘들다. 대신 강한 삶의 의지가 건반을 움직인다.

랑랑이 밝힌 목표도 꽤 당당하다. “놀랍도록 열정적인 중국의 음악 영재들을 키워 세계로 내보내고, 전 세계 청년들을 클래식 음악과 가깝게 하는 것이다.” 열에 들뜬 듯한 그의 연주는 이런 ‘세계적 야심’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올 12월 다섯 번째 내한 독주회에서 만날 수 있다.

글=김호정 기자
사진=소니뮤직 제공



랑랑

1982년  6월 중국 선양 출생

1985년  피아노 레슨 시작

1987년  중국 선양 콩쿠르 우승, 첫 독주회

1991년  베이징 중앙 음악원 입학

1994년  독일 에틀링겐 콩쿠르 1위

1997년  미국 커티스 음악원 입학

1999년  시카고 심포니와 협연으로 국제무대 데뷔

2001년  미국 카네기홀 데뷔 공연 매진

2007년  중국인 최초로 그래미 어워드 후보
      (최고 기악 독주 부문)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출연
      스타인웨이 피아노에서 다섯 종류의 ‘랑랑 스타인웨이’ 출시
      전기『Journey of a Thousand Miles』출간, 11개 언어로 번역

2009년  베를린 필하모닉 최연소 상주
      아티스트로 초청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전 세계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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