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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60) 다시 지리산으로

1950년 9월 미군의 인천상륙작전과 아군의 낙동강 전선 반격으로 후퇴를 거듭했던 북한군의 일부가 붙잡혀 포로가 된 모습이다. 공세에 밀렸던 북한군의 일부 병력은 지리산 등 남한의 깊은 산 속에 숨어 들어가 빨치산에 합류했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후방치안을 크게 위협했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빨치산은 일단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1951년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갔다. 그 2년 전 전남 광주의 5사단장이자, 호남지구 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서 빨치산을 토벌했던 경험으로 다시 그들을 제거해야 하는 임무를 받고서다.

51년에는 모두 4개 사단 규모에 이르는 병력을 이끌고 빨치산 토벌에 나섰지만, 이 땅에서 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63년이 되어서다.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던 작전임에도 아주 작은 규모의 빨치산은 그렇게 오래 명맥을 유지했던 것이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내가 광주 5사단장으로서 벌인 빨치산 토벌은 병력 면에서 그에 비교할 수 없었다.

따라서 당시로서는 작은 규모로 흩어져 깊은 산 속으로 숨은 빨치산을 모두 없애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험준한 산악 지역을 타고 북으로 향하기도 했고, 일부는 남한의 깊은 산과 민간에 위장한 채 숨어 또 다른 ‘미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숨을 되돌린 것은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 50년의 6·25를 맞아서다. 예전의 빨치산은 공산주의 이념을 추종하면서 남한 정부를 전복하려는 단순한 반란군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나중의 빨치산은 추악한 보복과 살해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6·25가 그 계기였다.

남한 내에서 활동하던 빨치산들은 남침하는 북한군의 전위대(前衛隊)로 돌변했다. 50년 6월 25일 기습적으로 남침했던 북한군의 공격 일선에서는 이들이 자주 모습을 나타냈다.

이들이 노렸던 대상은 북한군에 쫓겨 후퇴와 피란 준비를 하던 경찰과 우익 인사들이었다. 빨치산 활동이 활발했던 호남 지역에서 이들의 행동은 특히 거침이 없었다. 특히 미처 피란을 가지 못했던 우익 인사와 현지의 부유 계층은 북한군의 남침으로 다시 세상에 나와 날뛰던 빨치산이 잔인한 보복을 일삼은 대상이었다.

그전의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군대와 경찰에 정보를 제공했던 주민들도 이들에게 ‘반동 협력자’로 몰려 처참하게 죽어갔다. 전선(戰線)을 밀고 내려온 북한군은 오히려 조역(助役)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은 동네에서 함께 이웃으로 살면서 좌익 활동을 벌이다가 산으로 숨었던 빨치산이 그 마을 이웃 주민들과 가족들을 일거에 죽음으로 밀어넣은 학살극의 주역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활동으로 전쟁 중의 남한 지역에서는 처참한 동족 살육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전쟁 직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전남 영광군 염산면에서는 면 국민회 간부로 일해 오던 우익 인사 황규장씨 일가 142명이 하룻밤 사이에 몰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전남 장성군 소서면에서는 대지주 일가족 30여 명이 자신들의 소작인에 의해 떼죽음을 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 같은 참상은 북한군이 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후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서 더 빈발했다. 그전까지는 비교적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던 북한군들도 학살극에 가담하면서 희생은 더 커졌다.

전북 옥구군 미면 인민위원회를 주도했던 김행규는 9월 28일 북한군을 따라 후퇴하면서 우익 인사 43명을 살해해 신풍리라는 곳의 우물 속에 몰아넣었고, 또 다른 22명을 유운 부락의 우물 속에 집어넣었다.

이는 한국군이 다시 마을에 진주하면서 좌익 인사들과 그 부역자를 두고 다시 똑같은 형태의 징벌을 가하는 형태로 이어졌다. 빨치산과 좌익에 의해 가족을 빼앗겼던 사람들이 벌인 피의 복수극이었다.

모두가 좌익이 준동을 시작하면서 벌어진 보복의 악순환이었다. 이제 누군가 나서서 이 고리를 끊어야 했다. 대한민국을 부정하면서 그 체제를 전복하려는 세력에게 용서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을 처리하는 방식은 어디까지나 법과 제도의 기준에 따라야 했다. 개인적인 감정 차원에서 복수극이 벌어진다면 그 끝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광주 5사단장으로서 1차 빨치산 토벌에 나선 뒤 나름대로 성과를 쌓았다. 그리고 북한군과 중공군을 맞아 싸우다 2년 뒤인 51년 10월 지리산에 모여든 대규모의 좌익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다시 현장에 서야 했다.

나는 그동안 일선의 치열한 전장에서 충분한 경험을 쌓았고,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한 대규모의 토벌부대를 이끌면서 지리산으로 향했다. 내 부대원들의 총구는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개전(改悛)의 정을 보이고 대한민국의 일원(一員)으로 남고자 하는 빨치산과 그 추종자에게는 여지(餘地)를 남겨줄 것이다.

50년 6월 25일 벌어진 전쟁은 유엔군과 중공군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소강상태를 띠고 있었다. 휴전회담이 벌어지면서 전선은 대규모 기동전 대신 고지를 서로 뺏고 빼앗기는 소모전 양상을 보였다. 전선에서 일부 병력 차출이 가능해지면서 나는 대규모 부대를 지휘하며 빨치산 토벌에 나섰다.

나는 내 임지였던 강릉의 1군단을 떠나 육군본부가 있던 대구로 향했다. 지리산에 모여든 대규모의 빨치산과 북한군 잔여 병력을 토벌하는 임무는 막중했다. 작전계획을 세밀하게 짜야 했다. 그 작전의 명칭은 ‘쥐잡이(Operation Rat Killer)’였다. 빨치산은 쥐, 그러나 그 잡는 방법은 2년 전과 달랐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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