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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명성황후’ 15년 뒷얘기들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가 열다섯 살이 됐다. 1995년 초연 이후 130만 명의 관객이 들었다. 공연 횟수도 1000회를 넘겼다. 브랜드 가치가 견고해졌다. 이름값만큼 우여곡절도 많았다. 숨가쁜 고비가 여러 차례 있었다. ‘명성황후’ 연출가이자 제작자인 윤호진(62) 에이콤 대표로부터 들어봤다. ‘이제는 말할 수 있는, 명성황후 비화’ 4선이다.



시말서 쓰고, 급전 빌리고, 런던서는 한 수 배우고 …
97년 브로드웨이 첫 공연 땐 무대설치 문제로 36시간 대치

뮤지컬 ‘명성황후’는 15년간 13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대한민국 대표 뮤지컬로 자리잡았다. 남성적인 역동성이 돋보이는 무과시험의 한 장면. [에이콤 제공]
① 쇤버그가 작곡할 뻔?=작품 기획은 91년 시작됐다. 대규모 뮤지컬을 만든 경험이 거의 없었던 시절, 적합한 작곡가도 마땅치 않았다. 윤 대표는 해외로 눈에 돌렸다. 귀를 확 당긴 이는 프랑스 작곡가 클로드 미셸 쇤버그. ‘레미제라블’ ‘미스사이공’을 작곡한, 당대 세계 최고의 뮤지컬 작곡가였다. “겁이 없었다. 쇤버그 정도면 ‘명성황후’의 격을 높여 줄 거로 생각했다. 무작정 파리로 달려갔다.”



92년 파리의 한 카페. 윤 대표는 명성황후의 비극적 스토리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쇤버그도 마음이 동했다. 이듬해 한국에 왔다. 한국문화를 접하며 3박4일 머물렀다. 특히 나박김치에 밥 말아 먹는 걸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돈 문제가 걸렸다. 결국 쇤버그를 포기했다. 그가 ‘명성황후’ 음악을 만들었다면?



② 100주기를 맞춰라=명성황후 시해일은 1895년 10월8일. 100주기에 맞춰 95년 10월 8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개막하기로 했다. 또 돈 문제가 걸렸다. 공연 직전까지 경비를 정확히 가늠하지 못할 때였다. 임시방편으로 때우기 급급했다. 개막 2주를 앞두고 사고가 터졌다. 해외 편곡료로 당시로선 거금인 5000만원이 필요했다. 송금을 못하면 음악을 쓰지 못할 상황이었다.



윤 대표는 공연계 ‘큰 손’들을 찾아가 고개를 넙죽 숙였다. “작품이 너무 어둡다”는 차가운 반응만 돌아왔다. 윤 대표는 극장 측에 “모든 책임을 지겠다”란 시말서를 쓰고 공연 개막을 두 달 가량 연기했다. “그때만 해도 낭만이 있었다. 시말서로 얼렁뚱땅 넘어가니.” 시간을 번 그는 친구들로부터 십시일반 급전을 빌렸다. 그리고 12월30일 뮤지컬을 선보였다. 이틀만 지나도 명성황후 시해 101주기였다.



③ 뉴욕의 대소동=2년 뒤 뉴욕 링컨센터 공연이 성사됐다. 개막일은 97년 8월15일. 개막 나흘 전까지 무대설치가 완료돼야 했다. 무대세트가 담긴 컨테이너 박스가 극장 앞에 도착한 순간, 돌발사태가 벌어졌다. 극장 측이 “예상물량보다 너무 크다. 30만 달러를 더 내야 한다”며 문을 닫았다. 공연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던 순간, 윤 대표는 버티기에 들어갔다. 협상 테이블에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 반나절을 숨어 다녔다. 극장 측이 타협안을 냈다. “반값이라도 내라.” 경비는 줄였지만 시간을 잃었다. 리허설을 3분의1밖에 하지 못한 채 공연이 시작됐다.



④런던에서의 혹평=그래도 뉴욕 공연은 성공이었다. 2002년 런던 공연의 징검다리가 됐다. “영국 공연계가 한 수 배울 만 하다”(더 스테이지)는 호평도 있었지만 “크고 지루하고 어리둥절한 무대”(더 타임스), “국제화한 유치한 모방품”(가디언) 등 혹평도 쏟아졌다.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노래를 한 게 화근이었다. “비싼 수업료를 냈다. 국제적인 배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윤 대표)



최민우 기자



▶뮤지컬 ‘명성황후’ 15주년 공연=9월 1∼19일. 경기도 성남아트센터 오페라극장. 3만∼9만원. 02-2250-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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