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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여자정신근로령’ 공포 … 상당수는 공장 아닌 일본군 위안소로

 
  일본에 도착한 전라북도 출신 여자근로정신대원들. 중노동에 시달리며 임금조차 못 받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이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선발 과정에서, 또는 이동 중에 자기 의사에 반하여 위안소로 끌려간 사람들은 견딜 수 없는 치욕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런 사정을 알았기에 부모들은 사윗감 재목을 따질 겨를도 없이 혼사를 서둘렀다. (독립기념관 소장 사진)
 
물리적 관점에서 1년이란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일 뿐이어서 1910년이나 2010년이나 그저 같은 한 해일 뿐이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1년은 특정한 사건들로 구성되는 ‘고유의 질’을 갖는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고 끝난 해가 있고, 유난히 자연재해가 잦았거나 전염병이 극성을 부린 해도 있다. 근래에도 쌍춘년이니 황금돼지해니 해서 2006년과 2007년 사이에 출산율이 반짝 올랐던 적이 있다.

사회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1944년 가을과 1945년 봄은 예년에 비해 혼사(婚事)가 특히 많았던 시기다. 1943년 8월 1일자로 시행된 조선징병령에 따라 한국인 청년들이 입대하기 시작한 것은 1944년 하반기부터였다. 살아 돌아오기 어려운 전장에 아들을 내보내야 했던 부모들은 ‘씨’라도 남겨 둘 양으로 혼사를 서둘렀다. 한편 1944년 8월 23일 일본 칙령 제519호로 공포된 ‘여자정신근로령’은 딸 둔 부모들을 다급하게 했다. 말로야 군대 간 남성들을 대신해 공장에서 일할 것이라고 하지만, 떠도는 소문으로나 세상 돌아가는 꼴로 보나 일단 끌려가면 온전한 몸으로 돌아오기 어려울 것 같았다. 딸을 속히 기혼 여성으로 만들어 동원 대상에서 빼내는 것이 상수였다.

여자정신근로령은 ‘국민직업능력신고령’이 지정한 직업 능력을 가진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미혼 여성, 또는 자원(自願) 여성을 ‘여자정신대’라는 이름의 근로 요원으로 삼아 작업장에 배치하는 것을 골자로 한 법령이었다. 여자정신대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업체 또는 업주는 사전에 일본 지방장관에게 신청하게 되어 있었고, 지방장관은 이 신청에 따라 말단 지방행정 기관장, 또는 단체나 학교의 장에게 대원 선발을 명할 수 있었다. 이 법령 공포 후 서울의 각 여학교 교장들에게는 학생들에게 정신대 지원을 강요하는 임무가 부가되었다.

그런데 비리는 대개 법과 권력 곁에 있는 자들이 저지르기 마련이고, 법이 강압적일수록 그 정도도 심해진다. 일본군의 견지에서는 ‘위안소’도 필요 업소였고, ‘위안부’도 소요 인원이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여성들이 한결같이 증언하는 바대로, 그들은 공장에 가는 줄 알고 있다가 위안소로 빼돌려졌다. 누가 그들을 위안소에 팔아넘겼는지를 따지는 일도 필요하지만, 이 반인간적 범죄가 당대 권력의 일반적인 묵인과 방조 하에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한국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 총리의 지난 번 사과에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또 빠졌으니 피해자의 한을 풀어주지 못하는 사과에 진정이 담겼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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