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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일제에 합방을 청원한 매국단체 일진회

 
  일진회 고문 우치다 료헤이(왼쪽), 다케다 한시(가운데), 일진회장 이용구(오른쪽). 1907년 송병준의 정계 진출 이후에도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이완용을적으로 지지하자 이듬해 우치다와 다케다는 함께 일본으로 건너 가 일본 정계의유력자에게 일진회의 손을 들어줄 것을 호소했다.
 
러·일전쟁이 터져 양반과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던 그때. 양반지배체제와 전제황권 아래에서 설움과 탄압을 받던 주변인들 중 일부가 일제 침략을 단비 삼아 500년 동안 다져진 굳은 땅을 뚫고 나온 죽순처럼 고개를 쳐들었다. 1904년 9월 양반가의 서자로 설움을 받던 송병준과 황국협회에 의해 강제 해산된 독립협회 회원 윤시병은 일진회를, 그리고 한 달 뒤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사이비 종교로 몰려 탄압받던 동학당 출신 이용구는 진보회를 만들어 일제와 손잡고 정치세력으로 발돋움하려 했다. 세력 범위가 중앙에 한정되어 있던 일진회는 그해 12월 말 진보회를 품에 끌어안으며 조직을 전국으로 확장했다.

“외교권은 이미 한·일의정서 체결과 고문협약으로 일본에 의존하고 있는 이상 새삼 외교권 박탈에 저항할 필요가 없다.” 을사늑약 때 외교권을 일제에 넘기는 데 앞장섰던 일진회는 일본 우익의 거두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가 고문으로 취임한 1906년 10월 양의 탈을 벗었다. “천하의 형세가 급변해서 일·한연방에 이르더라도 반대하지 않겠느냐?” 우치다의 물음에 이용구는 “동학의 목적은 민(民)에 있지 군(君)에 있지 않다”고 화답했다. 1907년 5월 이완용 내각에 송병준이 농상공부 대신으로 입각하면서, 세칭 ‘무뢰배 집단’으로 불린 일진회는 이완용으로 대표되는 양반세력과 치열한 권력다툼을 벌이는 또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떠올랐다.

“합방의 이로움은 우리나라에 있고 귀국에는 없다. 우리나라는 농업이 풍부하지 않고 공업은 정교한 기술이 없으며 상업은 세계에 통하지 않는다. 빈약국인 한국을 병합해 부담을 지느니 장차 한국이 자립 자강할 수 있는 정(政)합방을 선택하라.” 망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1910년 1월 5일자 일진회 기관지 『국민일보』는 병탄 주장이 일본 정계의 지배여론으로 떠오르자, 일본에 대외주권을 넘기는 대신 독자적인 내각과 의회를 갖게 해달라는 ‘정합방론’을 일제 측에 제기했다. 그때 일진회 세력은 일제가 자신들을 조선 지배를 위해 손잡을 정치세력으로 인정해주길 바랐지만, 이 땅을 완전히 집어 삼키려 한 일제는 양반 계급의 기득권 유지만을 요구한 이완용 내각의 손을 들어주었다. 1910년 8월 22일 일제가 강제로 이 땅을 병탄한 지 한 달 뒤인 9월 26일 회원 수 14만여 명을 자랑하던 일진회는 토사구팽(兎死狗烹)되고 말았다. 한 세기 전 국망(國亡)의 슬픈 역사에서 오늘의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교훈은 그때 자신들만의 안락과 권력을 위해 나라를 판 이들이 온 몸을 던져 이 땅을 지키려 한 항일의병들보다 많았다는 뼈아픈 사실일 것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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