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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과 삐걱대던 매클레런, 군복 벗고 대선서 맞붙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올 6월 전쟁 중에 장수를 바꿨다. 스탠리 매크리스털 당시 아프가니스탄 사령관이 오바마를 비롯한 정부 고위 관계자와 아프간 정책을 비난하자 “문민통제 훼손”이라며 책임을 물은 것이다. 미국에서 전시 사령관이 바뀐 것은 1951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한국전쟁의 방향을 놓고 부딪쳐 더글러스 맥아더가 해임된 뒤 처음이었다.

전쟁 중에 대립하는 미국 대통령과 장군들, 그 갈등의 역사

매크리스털의 경질은 잡지 ‘롤링스톤’과 인터뷰한 내용이 빌미가 됐다. ‘롤링스톤’은 ‘통제불능의 장군’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매크리스털이 아프간 전쟁을 놓고 “대통령의 빌어먹을 전쟁”이라 비난했다고 보도했다.

매크리스털은 지난해 가을부터 아프간 병력 증파 문제를 놓고 백악관과 대립했다. 매크리스털은 “최소 4만 명을 (추가로) 파견하지 않으면 패배할 수도 있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그러나 오바마는 고민 끝에 매크리스털의 요구보다 적은 3만 명 증파를 결정했다. 미국 내 반전 여론과 눈덩이처럼 커지는 군비가 대통령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미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에 따르면 미국 국방비는 2008 회계연도를 기준으로 6962억 달러를 기록, 중국(601억 달러)보다 12배나 많았다.

매크리스털의 뒤를 이어 지휘봉을 잡은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사령관도 최근 들어 백악관과 엇박자를 내고 있다. 퍼트레이어스 사령관은 미군 철수 일정의 변경 가능성을 내비쳤다. 퍼트레이어스는 아프간에서 미군이 당초 예정대로 내년 여름 철군을 시작한다면 탈레반 세력이 강화돼 아프간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은 철군이 예정대로 내년 여름 시작될 것임을 확인했다. 게이츠는 미국인들의 반전 여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오바마 대통령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해 내년 7월 이후 순차적 철군 계획을 고수한 것으로 분석된다.

오바마, 퍼트레이어스와 엇박자
미국 역사상 대통령과 최고위 장군이 마찰을 빚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대표적 사례가 한국전쟁 때 ‘내부의 전쟁’을 치른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다. 당시 트루먼은 군의 최고 영웅이었던 맥아더를 해임했다. 만주 폭격을 둘러싼 대립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맥아더는 만주에 원자폭탄을 사용할 것을 공공연히 주장했다. 그가 머릿속에 그린 전쟁은 한국전쟁을 넘어 중국 공산당 정부로 상징되는 아시아 공산주의에 맞서는 전쟁이었다.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을 비롯한 미 행정부는 한국전쟁 초기부터 이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걱정하면서 한반도 내 재래식 전쟁으로 제한하기를 원했다.

맥아더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장제스의 군대를 활용해 아시아에서 공산주의를 몰아내야 한다”며 중국과 평화협상을 모색하던 트루먼 행정부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결국 그는 해임됐고, 자신의 해임 관련 청문회 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는 말을 남기고 물러났다.

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는 소련과 쿠바에 대한 공격을 놓고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커티스 르메이 공군 참모총장이 대립각을 세웠다. 미국 플로리다 해안에서 145㎞ 떨어진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세우는 소련에 위협을 느낀 백악관은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케네디를 비롯한 정부 고위층과 군부 장성들은 긴급대책회의에 나섰다. 르메이 장군은 강경하게 선제공습을 주장했고 케네디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했다. 두 사람은 충돌했다. 자칫 핵전쟁으로 비화할지 모르는 결정을 둘러싼 격론이었다. 결국 케네디 정부는 쿠바 해상 봉쇄령을 내렸고, 전쟁 일보 직전에 흐루쇼프 공산당 서기장과의 외교 교섭으로 사태는 마무리됐다. 미국은 쿠바 불침공을 제시했고 소련은 미사일기지를 철수했다.이처럼 대통령과 최고위 장성 간에 전쟁 수행을 놓고 갈등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대통령은 정치적 사안을 결정함에 있어 여러 가지 가능성을 함께 고려한다. 이때 전쟁은 여러 정치적 대안 중 하나에 불과하다. 따라서 국가의 전쟁 수행 의지는 선택적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국가 존립과 직결되는 위협이 아니라면, 승리를 위해 무제한적 희생을 해도 된다는 주장은 정치적 정당성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전쟁을 수행하는 장군들에게는 전쟁에 최선을 다하는 것 외에 다른 옵션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과 입장 차이가 갈등을 만들어내곤 한다.

클린턴·파월, 동성애자 차별 놓고 대립
전쟁이 아닌 군사정책을 놓고 대립한 경우도 있다. 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군내 동성애자 대우를 놓고 콜린 파월 당시 합참의장과 이견을 노출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진보 성향의 클린턴은 대선 공약으로 동성연애자에 대한 군내 차별을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취임 직후 군내 동성애자에게 부과하는 불이익을 철폐하는 내용의 대통령령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월을 포함한 군 지휘부는 군대 안에서 동성애를 허용할 경우 성질서 문란 등으로 군대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져 전투력에 큰 차질을 빚는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두 사람은 그러나 파국은 피했다. ‘군내 동성애 금지 철폐’ 문제는 동성애자들이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 한 군 복무를 할 수 있도록 절충점을 찾아 타협했다.때로는 사소한 이유로 대통령과 최고위 장군이 갈등을 빚기도 했다. 남북전쟁 당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과 조지 매클레런 북군 총사령관이 그런 경우다. 남북전쟁 초기 링컨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대통령이지만 현장 지휘관으로부터 중요한 정보를 차단당했고, 복지부동하는 지휘관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사보타주 때문에 속앓이를 해야 했다. 특히 북군의 초대 총사령관인 매클레런 장군과의 갈등은 심각했다.

매클레런은 미국 역사상 가장 느린 장군 중 하나였다. 그는 시종일관 남부동맹을 과대평가해 너무 더디게 움직였다. 8만 명이라는 당시까지의 미국 역사상 최대의 대군을 이끌면서도 ‘병력 증파’만을 요구하며 남부동맹의 수도 리치먼드로의 진격을 주저했다. 답답해하던 링컨이 한번은 그에게 편지를 썼다. “만약 군대를 사용하지 않으려면 내가 잠시 동안 빌려 쓰고 싶네”라고.

1862년 안티에탐 전투에서도 매클레런이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자 링컨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를 사령부로 이동시켰다. 매클레런은 1864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링컨에 대항했지만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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