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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모리스, 눈보라 속 12라운드 ‘지옥 레이스’ 한달 뒤 사망

19세기 프로골퍼들은 귀족들의 이런저런 내기에 선수로 나서야 했다. 뛰어난 기량으로 골프팬을 놀라게 한 그들은 20세기에 들어서자 골프의 주인공이 됐다.
골프가 뿌리를 내리던 19세기 후반은 호기심이 넘치는 시절이었다. 자연과 과학에 대한 궁금증으로 많은 발명품이 나왔다. 사람들은 골프라는 스포츠에 대해서도 호기심이 많았다. 골프는 수학공식처럼 딱 떨어지지는 않는다. 증명할 방법도 없었다. 그래도 답을 찾아야 했다. 내기를 걸면 됐다.19세기 골프 내기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은 조지 몰스워스다. 24세에 대영제국의 해군 장교가 되어 바다를 누비며 혁혁한 전과를 세운 그는 1857년 33세에 전역했다. 그는 맨체스터의 부잣집 딸과 결혼해 영국 남서부 웨스트워드 호에 있는 로열 노스 데본 골프장을 만들었다. 1870년 그는 골프장의 클럽하우스로 쓰게 된 호텔도 짓는다. 캡틴 몰스워스는 골프를 워낙 좋아했고 호탕해 내기도 즐겼다.

100년 전 프로골퍼들의 ‘내기 골프’

1875년 세인트 앤드루스로 그의 넷째 아들 아서를 데리고 간 일이 가장 유명한 일화다. 디 오픈 4회 챔피언인 영 톰 모리스를 불러내 아들과 12라운드짜리 마라톤 골프 내기를 시켰다. 날이 몹시 춥고 링크스에 눈이 쌓였는데도 캡틴은 막무가내였다.
아서는 대패했고 몰스워스는 망신을 당했다. 몸이 좋지 않았던 영 톰 모리스는 내기 후 한 달이 안 돼 세상을 떴다. 무리하게 내기를 강행한 몰스워스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골프 내기는 이후에도 거칠 것이 없었다. 클럽하우스에서 이런 내기를 거는 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었고 도전이 들어오면 거절하지 않는 것이 젠틀맨의 도리였다. 영 톰 모리스도 자신은 골프로, 활을 쏘는 양궁 궁사와 먼저 홀에 넣는 매치를 하는 등 많은 내기를 했다.

2년 후인 1877년 9월 몰스워스는 클럽회원들과 집에서 약 5㎞ 떨어진 골프장으로 걸어가 하루에 6라운드를 660타 이내로 끝내면 이기는 내기를 했다. 당시 이런 골프 지구력 테스트 내기는 흔한 일이었다. 24시간 내에 12라운드를 마치고 16㎞를 걸어올 수 있는가에 대한 매치도 있었다.

19세기 여성 골퍼의 복장을 차려입은 스코틀랜드 여인.
험한 바다에서 청춘을 바친 몰스워스의 집안은 강골이었던 것 같다. 그의 아들 아서는 영 톰 모리스와 내기 경기를 할 때 맹추위에도 반팔 옷을 입고 경기를 했다고 전해진다. 몰스워스가 6라운드 660타 내기를 한 1877년은 그가 52세 되던 해였다. 그는 악천후 속에 시작된 첫 라운드 9번 홀에서 우드가 부러지면서 14타를 쳤고 12번 홀에서는 드라이버 헤드가 찢어졌다. 1라운드의 성적은 120타였다. 몰스워스는 662타로 6라운드를 마쳤다.

몰스워스는 내기에 졌을까. 패배를 용납할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서둘러 한 라운드를 더 했다. 이번에는 104타를 쳤다. 그러곤 “내가 이겼다”고 주장했다. 120타를 친 첫 라운드를 빼고 7번째 라운드를 넣으면 646타로 6라운드를 마쳤다는 논리다. 내기 돈을 건 사람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일었다. 결국 심판은 몰스워스가 정상적으로 6라운드를 660타 이내에 돈 것으로 선언했다.

이듬해인 1878년 로열 리버풀(호일레이크) 골프 클럽에선 한밤의 라운드가 열렸다. 내기를 좋아하는 RW 브라운이 “어둠 속에서 150타 이내로 라운드를 마칠 수 있다”고 하자 다른 회원들이 돈을 걸고 안 된다고 했다. 룰 미팅도 했다. 만약 공을 잃어버릴 경우 벌타 없이 이전에 친 곳에서 다시 치는 것으로 했다. 잃어버린 샷은 계산한다. 또 갤러리들이 공 찾는 것을 도와주면 안 되는 것으로 정했다.

브라운은 공 32개를 잃어버렸다. 그것만으로도 32타를 잃었다. 그러나 그의 샷은 매우 정교했다. 경기를 지켜본 갤러리들은 그의 정교함에 매우 놀랐다. 4번 홀 페어웨이에는 토끼 굴이 많았는데 브라운의 샷이 토끼 굴에 들어갔다. 갤러리들은 그것을 봤지만 규칙에 따라 알려주지 않았다. 공을 못 찾고 친 자리로 돌아간 브라운의 샷은 같은 토끼 굴로 들어가 버렸다. 역시 볼을 찾지 못하고 돌아가 친 세 번째 샷은 토끼 굴 1야드 옆에 멈췄다. 그는 147타로 홀 아웃했다. 브라운은 내기 돈을 챙기며 “야간 골프는 눈이 아니라 귀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20년 후인 1907년 같은 골프장에서 비슷한 내기가 걸렸다. 주인공은 디 오픈 사상 첫 아마추어 우승자인 존 볼이다. 그는 오픈 챔피언십을 포함, 메이저 9승으로 골프 명예의 전당에 올라 있다. 그는 말수가 적은 미스터리의 인물이었는데 내기를 마다하지는 않았다. 그의 아버지 존 볼 시니어도 말과 사람의 100야드 경주 등 많은 내기를 했다.
한 회원이 “천하의 존 볼이라도 이런 짙은 안개 속에선 2시간15분 이내에 90타 이내로 경기를 끝낼 수 없다”고 말한 것이 발단이 됐다. 존 볼은 81타를 기록했다. 시간도 남았다. 이상한 것은 그가 일주일 후 앞이 잘 보이는 화창한 날씨에 82타를 쳤다는 것이다.

1912년 런던 인근의 서닝데일 골프장에서는 손수건으로 눈을 가린 프로와 아마추어 골퍼가 대결을 했다. 이 내기는 신문에 난 골프 레슨 때문에 생겼다. 데일리 메일에 난 ‘스윙할 때 눈은 항상 볼을 주시해야 한다’는 내용을 본 골프 스쿨 사무국장 가이 리빙스턴이 반박 편지를 보내면서다. 리빙스턴은 공에 눈을 고정한다면 볼이 움직일 때 눈과 머리도 움직여 스윙을 망가뜨린다. 클럽이 공을 때리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눈은 공이 아니라 공 바로 아래 땅에 고정시키고 있어야 한다. 스윙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라면 눈을 가리더라도 볼을 제대로 칠 수 있다고 했다.

헤드업과 관련한 민감한 내용이다. 그의 주장은 파문을 일으켰다. 찬반이 엇갈렸다. 리빙스턴과 함께 일하던 동료 알프 투굿이 “눈을 가리고도 어떤 아마추어와 경기해도 이길 수 있다”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 프로모터들이 나타났고 즉각 매치가 성사됐다. 투굿이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런던 인근 서닝데일에서 아마추어인 틴달 애킨슨과 경기하게 됐다. 엄청난 내기 돈이 걸렸다.

오픈 5회 챔피언인 J.H. 테일러는 “골프에서 리빙스턴의 주장보다 말이 안 되는 말은 없었다”고 했다. 권위 있는 골프 기자인 버나드 다윈은 “일리가 없지는 않지만 매 샷마다 캐디가 마치 교수형 집행자처럼 골퍼의 눈을 가리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비꼬았다. 디 오픈 우승자인 해럴드 힐튼은 “롱 샷을 칠 때는 땅을 봐야 한다는 리빙스턴의 말이 맞을 수 있지만 짧은 샷에서는 공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의 골퍼 모두가 이 대결에 관심을 가졌다.

투굿은 티샷을 잘 했지만 두 번째 샷은 슬라이스성 토핑을 냈다. 사진 기자 귀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위험한 샷이었다. 투굿은 첫 홀에서 7타를 쳐 5타를 기록한 상대에게 패했다. 2번 홀에서 투굿의 롱게임은 아주 좋았다. 그러나 4퍼트를 하는 바람에 또 졌다. 서닝데일은 그린에 굴곡이 많아 투굿에게 매우 불리했다. 투굿은 3개 홀에서 이겼지만 결국 8홀 차로 졌다.

내기는 계속됐다. 1912년 잉글랜드 부시홀 코스에서였다. ‘인디아의 왕관’이라는 연극에서 갑옷을 입고 연기하던 배우 해리 더스가 필드에서 같은 복장으로 연극의 상대인 그레이엄 마깃슨과 9홀 매치를 한 것이다. 갑옷은 매우 더웠고 스윙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불편했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더스는 편한 옷을 입은 상대와 비교적 팽팽한 게임을 했으나 2홀 차로 졌다. 이 매치도 눈을 가린 매치처럼 화제가 됐다.
당시 영국의 골프 잡지인 ‘골프 일러스트레이티드’는 이런 쇼에 일침을 가했다. ‘이제 눈을 가린 투굿이 갑옷을 입은 더스와 경기를 할 차례다. 심판은 기어 다녀야 하고 캐디는 체인으로 손을 묶어 입으로 클럽을 골퍼에게 전달해줘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이런 코미디 같은 골프가 사라질 것이다.’ 이후 영국의 골프는 서서히 성숙됐고 이런 내기를 위한 쇼는 사라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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