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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노하우에 한국의 건조 능력 더해지면 중국 도전 걱정 없다

영국 글래스고대에서 온 인턴들이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 설치된 30층 높이의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 건조 중인 배를 살펴보고 있다. 이 크레인으로 들어올린 블록 10~13개를 맞춰 배를 조립한다. 블록 하나의 무게는 최고 1000t에 달한다. 신인섭 기자
“다리를 건너 섬(거제도)에 들어오니 조선소가 하나 나타났다. 꽤 컸다. ‘다 왔군’ 하는데 그냥 지나쳐 한참을 더 간다. 다시 조선소가 나타났다. 처음 것의 10배는 됐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컸다.”두 달 전 앨리스터 스콧 클레랜드(22)가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를 처음 본 느낌이다. 그는 영국 글래스고대 조선공학과 4학년이다. 같은 과 같은 학년 동료 4명과 함께 지난달 이곳을 찾았다. 3개월간의 인턴을 위해서다. 클레랜드는 “내 키의 서너 배가 넘는 프로펠러와 방향타를 실제 보니 압도적”이라고 감탄했다. 모니터 속의 설계도로만 보던 것과는 느낌이 확 달랐다고 한다.

英 글래스고大 조선공학과 5명 거제도 조선소 탐방기

유럽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 조선업계를 장악했다. 영국은 40년대 이미 8만t급 대서양 횡단 여객선인 퀸엘리자베스·퀸메리호를 만들었을 정도로 독보적인 기술력을 자랑했다. 글래스고는 스코틀랜드의 경제 중심지로 대영제국 시대의 주요 무역항이다. 항구가 번성하면서 조선산업도 발달했다. 글래스고대는 조선공학 분야에서 뉴캐슬대와 함께 영국 최고 수준이다. 그런데 그 대학의 조선공학 전공자조차 이처럼 큰 배는 볼 기회가 없는 것이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조선소가 없기 때문이다.

동료 제프리 이언 뮈어(21)는 “영국의 조선소에서는 군함을 제외하면 2000~3000TEU급 컨테이너선을 만드는 것이 고작”이라며 “학교에서 배운 설계기술이 직접 사용되는 모습을 보려면 한국으로 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1TEU는 길이 20피트(약 6m)짜리 컨테이너 한 개를 뜻한다. 배가 클수록 많이 실을 수 있다. 삼성중공업을 비롯한 국내 조선소에선 1만4000TEU급 컨테이너선을 만들 수 있다. 그리스 국적인 ◀파나기오티스 루소스(25)도 “고향에 조선소가 세 개 있지만 수리와 군함 생산만 할 뿐 상업용 선박은 만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거제조선소 면적은 330만㎡(약 100만 평)에 달한다. 정동철 홍보파트장은 “땅 위에서 배를 만드는 드라이독 3개와 물 위에 띄워 놓은 플로팅독 3개를 갖추고 있다”며 “연말에 드라이독 하나를 추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가장 큰 ‘3번 드라이독’은 길이 600m에 폭 100m다. 4400TEU급 컨테이너선 네 척을 한꺼번에 만들 수 있다. 정 파트장은 “현재 1만6000TEU급 제조 능력까지 갖췄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에 이어 세계 2위다. 제조 능력만큼 실제로 배를 만들면 길이가 400m에 달한다. 부산항에는 댈 수도 없을 정도로 크다.

배를 만드는 작업은 레고 블록을 조립하는 것과 비슷하다. 10~13개의 조각(블록)으로 나눠 거제도와 중국 닝보(寧波) 등에서 만든 뒤 끌고 와 조립한다. 예인선에 끌려 독(dock) 옆에 도착한 블록은 골리앗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져 맞춰진다. 자체 무게만 3600t에 달하는 이 크레인은 높이가 80m에 달한다. 30층 빌딩 높이다. (국내에서 가장 큰 골리앗 크레인은 울산 현대중공업에 있는 높이 128m짜리다.) 이 높이에서 5㎜ 이내의 오차로 블록을 맞춰야 한다. 독에서 조립한 배는 물에 띄우는 진수 과정을 거친 다음 암벽에 묶어 놓고 내장과 배관 등의 작업을 한다. 거제조선소에는 배를 묶어 놓는 암벽의 길이만 7.5㎞에 달한다. 동시에 23척의 배를 댈 수 있다.

“한국 인턴 경험은 취업에 유리”
영국의 조선산업은 한국과 큰 격차가 있지만 조선해양 부문에서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세계 4대 선급기관은 영국(LR)을 비롯해 노르웨이(DNV)·프랑스(BV)·독일(GL)에 있다. 선급기관은 선박 설계의 기준을 만들고 선주의 위임을 받아 조선 과정을 감독하는 역할을 한다. 국제해사기구(IMO) 본부 역시 런던에 있다. 삼성중공업이 글래스고대와 함께 인턴 과정을 만든 것도 이런 점을 고려한 것이다. 조경홍 차장은 “세계적인 조선업체에서 현장 실습을 하고 싶은 대학 측과 유럽의 인맥을 쌓으려는 회사 입장이 잘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말했다. 그는 “삼성에서 100만원의 월급과 숙식을 담당하는 대신 대학 측이 왕복 항공료를 부담한다”고 설명했다. 유럽 대학과 손잡고 장기 인턴제도를 운용하는 곳은 삼성중공업 하나밖에 없다.

이 과정은 학생들에게도 인기다. 앤드루 윌리엄슨(25)은 인턴 경험이 취업에 도움이 되느냐는 질문에 “엄청난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선급기관이나 선주사들이 삼성중공업에서 일한 경험을 높게 평가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전 세계를 돌아다녀야 하는 직업의 특성을 감안할 때 아시아에서의 인턴 경험은 현지 문화에 잘 적응한다는 보증서나 마찬가지다. 영국에서 조선 전공자들은 졸업 후 3만~3만5000파운드의 연봉을 받는다. 2만5000파운드 정도인 일반 공대 졸업생보다 보수가 좋다. BP나 셸 같은 석유 메이저에 들어가면 30%쯤 더 받는다. 윌리엄슨은 “삼성 인턴 과정은 이력서 한가운데 써 넣을 가치가 있다”며 “지원자 수십 명이 몰려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고 소개했다. 실제로 2008년 첫 인턴 과정을 거친 5명 가운데 한 사람은 일본선급협회(NK)에 자리를 잡았다. 세 명은 선주사에 취업했고 그중 한 명은 삼성중공업에 와 배 만드는 것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한국의 직장문화는 이들에게 생소한 구석이 적지 않았다. 루소스는 “아침에 노래를 크게 틀어 주면 이에 맞춰 체조를 하는 모습을 처음 접했을 때 가장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공통적인 지적은 너무 근무시간이 길다는 것이다.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인 코리신(23)은 “할 일이 남았다고 오후 10시, 11시까지 일한다”며 “그만큼 독서 등 자기 시간을 빼앗긴다”고 말했다. 클레랜드는 “함께 퇴근하고, 직장을 나선 뒤에도 사교 활동을 같이하는 것에 놀랐다”며 “삼겹살에 소주 한 잔 곁들이는 것은 정말 마음에 들지만 너무 많이 마실 땐 괴롭다”고 했다. 뮈어는 “선배가 2~3명의 후배와 함께 공부를 하면서 노하우를 알려주는 문화에 놀랐다”며 “후배 입장에서 알고 싶은 것을 쉽게 배울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이들과 함께 골리앗 크레인에 올랐다. 길이 300m를 넘나드는 늘씬한 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장해기 기술사는 “배의 왼편(좌현)은 항구에 대는 쪽이라는 뜻의 포트사이드, 반대쪽(우현)은 스타보드사이드라고 부른다”고 알려 준다. 밤에 항해를 할 때면 포트사이드에는 붉은색, 스타보드사이드에는 녹색의 등을 켠다. 선수와 선미에 단 항해등까지 확인하면 얼마나 큰 배가 어느 쪽으로 가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유조선은 속도가 11노트(시속 20㎞) 정도지만 컨테이너선은 24노트(시속 43㎞)다. 하루에 1000㎞ 이상을 이동할 수 있다. 장 기술사는 “컨테이너선이 유럽까지 한 번 가는 데 드는 연료비만 25억~30억원”이라며 “유가가 오르면서 연료 효율을 높이는 데 조선업체들이 전력투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졸업 후 거제도로 다시 오고 싶어”
유럽 대학생이 오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일 만큼 한국의 조선산업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올 상반기 국가별 선박 인도량에선 중국이 한국을 100만t 이상 앞선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2000년대 들어 일본을 제치고 1위에 오른 한국이 10년 만에 선두를 중국에 내준 것이다. 일본에 시장을 내주고 몰락한 유럽이나 한국에 따라잡힌 일본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에 대해 박중흠 부사장은 “한국은 일본이나 유럽과는 상황이 다르다”고 단언했다. 유럽·일본은 자국 내 수요를 기반으로 조선산업을 키웠지만 한국은 처음부터 수출을 염두에 두고 조선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만큼 경쟁력 확보에 목숨을 건다. 일본은 엔고로 선박 수출길이 막히자 조선소 인력을 줄이고 물량을 축소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와 달리 한국은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유조선·컨테이너선에서 초대형 선박,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시추선 등 부가가치가 높은 쪽으로 주력 제품을 빠르게 바꾸고 있다. 컨테이너선은 TEU당 가격이 1만 달러 정도다. 1만TEU급 배 한 척을 만들면 1억 달러(약 1200억원) 정도를 받을 수 있다. LNG 운반선은 한 척당 2억 달러(약 2400억원)를 넘는다. 천연가스를 바다 밑에서 끌어올려 액체로 만드는 기능을 갖춘 LNG-생산저장하역선(FPSO)은 더 비싸다. 유정을 뚫는 시추선(드릴십)은 1조원을 받고 만들어 준 적도 있다. 현재 전 세계 바다에서 운항 중인 30만t급 LNG 운반선 18척 가운데 11척을 삼성중공업이 만들었다. LNG-FPSO도 6척을 납품했다.

중국의 1위 부상에 대해서도 박 부사장은 “일시적인 현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2008년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로 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자금 조달 시장이 꽉 막혔다. 중국 정부만이 최고 90%까지 융자를 하거나 보증을 서 준 덕에 발주가 중국으로 몰렸다는 것이다. 그는 “설계·감리면에서 유럽의 소프트웨어 인프라와 선주들을 포함한 인적 네트워크에 한국의 생산 능력을 결합하면 중국의 도전은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가격경쟁력 확보를 위해 자동화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거제조선소에는 직원 1만2000명과 협력업체 직원 1만 명이 근무한다. 갈수록 인건비가 오르고 숙련 인력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자동화밖에 없다. 이미 용접 공정의 70%를 사람 대신 로봇이 한다. 용접 다음으로 페인트를 칠하는 도장 공정이 자동화의 목표다.

인턴들도 한국 조선의 경쟁력이 강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루소스는 “세계 최대 조선소 1위부터 7위가 한국 업체”라며 “직접 와 보니 큰 부지에 수많은 근로자가 모여 높은 생산성을 올리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클레랜드는 “최고 조선소들이 모여 있는 한국은 엔지니어가 역량을 키우는 데 최적의 환경”이라며 “졸업 후 꼭 거제도로 돌아오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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