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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청년 이승만

1년 만에 정동길을 걸었다. 지금은 공원이 된 옛 배재학당 터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을 끼고 난 좁은 길을 따라 서소문로까지 뻗은 좁은 길이다. 1년여 전만 하더라도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를 흥얼거리며 분위기에 취해 걷던 그 길에서 그간 듣지 못했던 소리를 들었다. 새로운 장면도 봤다. 20대 청년 이승만이다. 그는 외교사절과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들이 참석한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학생 대표로 영어연설을 하고 있었다.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한성감옥으로 끌려가는 ‘대한제국의 대역죄인’ 이승만도 봤다.

On Sunday

기자는 지난 1년 동안 연수차 하와이 호놀룰루에 체류했다. 그곳에선 죽음을 눈앞에 둔 90세 노인 이승만을 만났다. 해발 300m의 산기슭에 서 있는 노인 요양원 마우나라니의 202호 병실. 창밖으로 푸른 와이키키 해변과 다이아몬드 헤드가 내려다보였다. 숨막힐 것 같은 바깥 절경은 거꾸로 어두침침하고 썰렁한 병실 안의 분위기를 한층 더 가라앉혔다. 그는 반신불수의 몸으로 침대에 누워 이역만리 고국을 그리워했다. 부인 프란체스카는 병실 식사에 물려 버린 이승만을 위해 ‘날마다 김치찌개 김칫국…’이란 자작 노래를 불러 위로했다.

이 땅에서 ‘독재자’에서 ‘국부(國父)’까지 극한의 평가를 받고 있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분명한 건 그의 20대는 피 끓는 애국청년, 부패한 왕정에 반대하는 반체제주의자, 혁명가였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을 다녔던 그는 내심 민주공화정을 지지했지만 겉으론 입헌군주제로 개혁을 주장했다. 일본과 러시아ㆍ미국 등 세계 열강이 조선의 이권을 노리고 밀려오던 당시 열강으로부터의 자주 독립을 외쳤다.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청년 이승만에겐 무능하고 쇠잔한 군주에 불과했다.

정상에 오른 사람에게 초심(初心)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일까. 말년의 대통령 이승만은 ‘인의 장막’에 갇혀 독재자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자신이 아니면 어지러운 대한민국을 이끌 사람이 없다고 믿었다. 그는 여전히 스스로 애국자였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 가까이 지났다. 혁명가에서 독립운동가, 초대 대통령으로 거침없이 세상을 달렸던 이승만이지만 세상은 초심을 잃어버린 지도자를 독재자로 부르고 태평양 한가운데 외딴섬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슬픈 망명객으로 생을 마쳐야 했다.

오는 29일은 경술국치, 일본제국에 조국을 빼앗긴 지 100년이 된 날이다. 그때 이승만은 미국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딴 뒤 조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국은 없었다. 식민통치하에서 서울YMCA의 한국인 학감으로 활동하며 기독교 청년운동에 몰두하던 그를 일제는 요주의 인물로 감시했다. 혁명가 이승만이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 변신해 미국으로 떠난 이유다. 경술국치 100년. 이제는 정동길에서 만난 20대의 혁명가, 30대의 독립운동가, 40대의 임시정부 대통령, 70대의 건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기억할 때가 됐다.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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