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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왔다, 이름 모를 학도병 전우여

60년 전 오늘이었다. 1950년 8월 11일, 윤병국(79)씨는 전쟁터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눈앞에서 전우들이 북한군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곳곳에서 수류탄이 터졌다. 여기저기 흩어진 파편이 날아와 교복을 뚫고 몸에 박혔다. 총을 잡아본 경험조차 없던 어린 학생들이었다. 16세 중학생에서부터 24세 대학생까지 학도병 71명은 북한군의 파상공세에 맞서 그렇게 11시간을 버텼다. 윤씨를 포함한 학도병들은 경북 포항의 후방지휘소였던 포항여중에 남아 6·25전쟁 발발 후 남진하던 북한군을 몸으로 막으며 우리 군이 후퇴하는 시간을 벌었다. 그들은 군번도 받지 못한 채 교복을 입고 참전했다. M1소총 한 자루와 실탄 250발이 그들에게 주어진 전부였다. 열심히 싸웠지만 정규군인 북한군에 맞서기엔 역부족이었다. 71명의 학도병 중 48명이 전사했다. 윤씨는 풀숲에 숨어 포로로 잡혀가는 전우를 숨죽인 채 지켜봐야 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최근 영화 ‘포화 속으로’로 재연됐다.



영화‘포화 속으로’ 실존 5인

서울 국립현충원에서 ‘대한학도의병동지회’ 회원들이 묵념하고 있다. 왼쪽부터 윤병국(79) 회장, 정수득(79)·박종은(78)·주정만(80)·문찬영(76)씨. [김태성 기자]
11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무명용사탑 앞에서 이들을 기리는 추모제가 열렸다. 윤씨는 올해 1월 대한학도의병동지회를 창립하고 회장직을 맡았다. 이날 포항여중 전투에 참전했다가 살아남은 전우 5명이 모였다. 이들은 무명용사탑 앞에서 제를 올린 후 돌아오지 못한 전우 13명의 이름을 불렀다. 나머지 전사자 35명은 이름도, 소속도 모른다. 남아 있는 공식 기록도 없다. 윤 회장은 “입대할 때 노트에 이름을 적었는데 전쟁통에 사라졌다”며 “시신 수습 당시 신분증이 나온 사람들만 기록으로 남아 있다”고 했다.



윤씨는 6·25전쟁이 터지자 두 살 위의 형과 함께 대구로 피란을 내려왔다. 당시 그의 나이는 19세. 서울 경신중학교 6학년이었다. 그해 7월 말, 대구시내엔 ‘조국을 사랑하는 학도여! 조국의 운명은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다’는 학도병 모집 격문이 곳곳에 나붙었다. 그는 형과 함께 자진입대했다. 그때 전국 각지에서 대구로 피란 왔던 87명의 학생이 학도병으로 자원했다. 여기서 밀리면 대한민국이 망한다는 절박감이 이들을 전쟁터로 향하게 했다. 윤씨는 “공부만 할 줄 알던 어린 학생들이었다. 그저 나라를 구해야겠다는 젊은 혈기만 갖고 참전했다”고 했다.



포항여중에 투입된 지 3일 만인 11일 혈전이 벌어졌다. 윤씨는 전투 중에 형과 생이별을 했다. 3년 후 부산에서 다시 만났지만 그때는 서로 죽은 줄 알았다고 했다. 그는 “당시 지휘부가 학생들만 남긴 채 사라졌다”며 “전쟁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많은 학생이 희생됐다”고 설명했다.



학도병 이야기를 다룬 영화 ‘포화 속으로’ 포스터.
윤씨가 동지회를 창립한 이유는 군번도 없이 나라를 위해 참전했던 학도병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다.



윤씨는 “학도의병들이 군번을 받지 못했고 전쟁에 참여한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훈·포장 수여와 국가유공자 대우를 하지 않고 있다”며 울분을 토로했다. 지난 몇 년간 청와대와 국방부 등에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53, 54년에 훈·포상 누락자가 없는지 재조사했기 때문에 소급 포상할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는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학도의병이 영화로 재조명되는 등 관심이 높아졌다”며 “우리들이 명예롭게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글=김효은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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