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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50) 박정희와 김종필의 육사 8기

당시 정보국의 업무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지금의 기무사와 정보사, 심지어는 국가정보원의 업무를 모두 수행하는 곳이 당시의 정보국이었다. 38선 이북으로 계속 요원을 파견해 북한의 동태를 파악하는 일이 시급했고, 숙군 작업에 이어 군대 내에 아직 좌익이 활동하고 있는지 여부도 체크해야 했다.



정보국 신입 김종필, 정보국 문관 박정희 … 만남은 운명이었다

당시 정보국의 힘은 막강해져 있었다. 내가 1948년 4월 정보국장 자리에 막 부임했을 때의 상황과는 너무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좌익을 솎아 내는 일인 방첩(防諜) 업무에다, 38선 동향을 예의 감시하고 적정(敵情)을 파악해 수시로 대한민국 최고 지도부에 이를 전달하는 기밀(機密) 업무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정보국에는 미군 군사고문단의 지원으로 막대한 물량의 미군 전투식량 C레이션이 공급되고 있었다. 시중에서는 아주 값비싸게 팔려 나가는 물품으로, 예산 외의 지출이 필요할 경우 나는 미군이 지원한 두 창고 분량의 C레이션을 현금 대용으로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 유세에 나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모습이다. 오른쪽부터 육영수 여사, 박정희 당시 대통령,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49년 숙군 작업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 백선엽 정보국장의 지시에 따라 정보국에 뽑혀 온 육사 8기생 김종필 소위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중앙포토]
국방부나 육군본부 등 서울에 있는 국군 최고 지도부에도 이런 혜택은 없었다. 기밀 업무를 다루는 데 필요한 경비를 충분히 사용토록 배려한 미군 덕분이었다. 당시에는 충분한 예산을 지원받지 못했던 국방부나 육본에서도 별도의 경비가 필요할 경우 정보국장인 내게 이 미군의 C레이션을 받아다 쓰는 형편이었 다.



여하튼 숙군 작업까지는 김안일 방첩과장과 김창룡 1연대 정보주임, 그리고 경찰에서 수사관으로 있다가 숙군 작업을 위해 군대로 끌고 온 조사팀의 활약으로 버텼다고는 하지만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던 정보국의 많은 업무를 처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그에 따라 대한민국이 정식으로 출범하면서 조선경비사관학교라는 이름에서 육군사관학교로 개칭한 육사의 생도 중에 우수한 인력을 정보국으로 데려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숙군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그런 어느 날 나는 유양수 전투정보과장에게 “당신이 태릉에 있는 육사에 가서 새로 임관하는 생도 중 성적이 우수한 사람들 위주로 새 정보국 요원들을 뽑아 오라”고 지시했다. 그는 며칠 뒤 “육사 요원을 선발하러 태릉에 다녀오겠다”고 보고했다. 나는 사람 선발에 신중을 기하자는 차원에서 계인주 중령과 함께 보냈다.



그들은 육사 8기가 임관하기 2주 전에 육사에 연락을 했다. 먼저 곧 졸업하는 8기생들의 성적을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육사는 정보국의 요구대로 8기생의 성적을 산출한 직후 그 성적표를 보내왔다.



계인주 중령과 유양수 대위는 곧장 태릉으로 달려갔다. 육사 8기생은 1200여 명 정도로 인원이 무척 많았다. 나는 가능하면 우수한 인재를 뽑겠다는 욕심에서 졸업 성적 100등 이내의 사람을 뽑아 오라고 지시했다.



육사도 그런 정보국의 인재 필요성과 역량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의 요구는 순순히 받아들여졌고 계인주 중령과 유양수 과장은 태릉의 육사 교정으로 가서 면접을 진행했다.



8기생으로 나중에 중앙정보부에서 활동한 최영택 예비역 대령은 당시 상황을 잘 기억하고 있다. 그는 “졸업을 앞둔 어느 날인가 학교 측에서 학생 일부를 어떤 교실로 모이라고 했다. 면접을 봐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우리는 면접이 진행되는 교실 바깥 복도에서 길게 한 줄로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계인주 중령과 유양수 과장이 자리에 앉아 학생들을 면접했는데, 주로 묻는 것이 출생 지역과 가정 배경, 그리고 이념과 종교 등이었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계인주와 유양수는 경찰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사상적 배경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서 육사 8기생들을 면접했던 모양이다.



최영택씨는 “결국 나중에 명단을 보니까 김종필을 비롯해 이희성·이영근·석정선 등 동기생 31명이 뽑혀 있었다”고 했다. 그는 “당시 정보국은 나중에 국정원과 기무사를 합친 기구보다 힘이 센 곳이었고 정보국 신분증이면 통하지 않는 데가 없었던 때라 면접에 합격한 동기생들이 정보국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고 했다.



이들 8기생은 임관 뒤 3주 훈련을 받았다. 청량리의 예전 시조사 건물이 있던 부지의 정보학교에서였다. 이들은 교육을 받은 뒤 정보국 산하 각 부서에 배치를 받았다. 최영택 예비역 대령이 회상하는 당시 정보국 풍경은 이랬다.



“명동을 중심으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정보국의 각 부서를 모두 돌아다녔습니다. 전투정보과에 들렀는데, 상황판으로 사용하는 큰 테이블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 위에는 한반도 지도와 중간에 굵은 선으로 그린 38선 상황도 등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어요. 그 가운데 민간인 복장을 한 사람이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지요.”



육사 8기생들이 전투정보과에 들러 사무실 안에 들어섰을 때 상황판 테이블 한가운데에 앉아 묵묵하게 업무를 수행하던 사람,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좌익 혐의로 사형에 몰렸다가 간신히 형 집행정지를 받은 뒤 군복을 벗고 문관 자격으로 정보국에서 일하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종필을 비롯한 육사 8기생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한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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