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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47) 사람을 살리는 일

겉으론 무뚝뚝해 보였지만, 나중에 들은 얘기를 두고 볼 때 박정희라는 인물은 사실 감정이 매우 풍부했던 모양이다. 내가 정보국에서 데리고 있던 김점곤 소령이 전투정보과장을 내놓고 광주 5사단 부연대장으로 갈 무렵이었다. 박정희와 친분이 매우 두터웠던 그는 박 소령의 석방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김창룡 대위로부터 박정희가 곧 풀려난다는 소식을 석방 당일 미리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의 마음을 헤아려 밤중에 풀려나온 그를 곧바로 찾지는 않았다. 김 소령은 하루를 기다렸다 다음날 일찌감치 박정희의 집을 찾아갔다. 사지(死地)에서 돌아온 그를 위로라도 해주고 싶어서였다.



석방 다음날 김점곤이 집을 찾았다
박정희는 밥먹다 말고 달려나왔다
죽음 앞에서도 무덤덤했던 그 …
김점곤을 부둥켜 안고 엉엉 울었다

두 사람의 집은 지금의 서울 용산 미군기지 자리에 있었다. 미군기지가 들어서기 전 그곳에는 군인 관사가 있었는데, 두 사람의 집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김 소령이 아침 일찍 길을 건너 박정희가 살던 집의 문을 밀고 들어서자 마침 그는 아침을 먹고 있었다고 했다. 거실 저편의 안방에서 김을 한 장 집어 밥과 함께 막 먹으려던 박정희는 문을 열고 들어서던 김 소령과 눈이 마주쳤다고 했다. 박정희는 벌떡 일어서더니 한걸음에 달려나와 김 소령을 부둥켜 안더라고 했다. 그러고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엉엉 울기만 하더라는 것이다. 울음이 그치지를 않았다고 했다. 김 소령도 박정희가 하도 섧게 울어 함께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인간 박정희의 진짜 모습이었다.



1970년대 중반께로 추정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진이다. 넓은 경작지를 바라보면서 상념에 젖은 모습이다. 박 전 대통령은 겉으론 꿋꿋하고 강인한 성격이었지만, 속으로는 정감이 풍부한 면모를 자주 보였다는 게 그를 옆에서 지켜본 김점곤 예비역 소장의 증언이다. [중앙포토]
나는 그렇게 박정희의 목숨을 살렸지만, 역시 죽음의 문턱에 들어섰던 지인(知人)을 결국 형장(刑場)의 이슬로 보낸 일이 있다. 최남근 중령이었다. 그는 만주에서 만군(滿軍)으로 있던 시절 처음 알았고, 나중에 해방 뒤 평양에 와서 다시 만났던 인물이다.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이 평양에서 점차 세력을 뻗쳐가던 무렵인 1945년 12월 나, 그리고 김백일과 함께 서울로 내려왔고 군사영어학교에 같이 입교해 정식으로 군문(軍門)에 들어섰던 사람이다.



그는 48년 10월 전남 여수와 순천의 14연대 반란사건 진압을 위해 15연대 연대장으로서 주둔지였던 경남 마산을 떠나 전남 구례 쪽으로 이동하다가 말썽을 빚었다. 애초 그는 지리산으로 도주하던 반란군 잔여 세력에 잡혔다가 가까스로 도망쳐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좌익 가담 혐의에 대한 수사를 받았는데, 조사가 잠시 지체되는 틈을 타서 풀려나 충북 지역으로 자취를 감췄다. 그의 행적을 뒤쫓던 김점곤 전투정보과장은 그 혐의를 입증한 보고서를 내게 넘긴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방대한 분량의 좌익 혐의자 조사 결과를 읽느라고 그 보고서를 보지 못했다.



하루는 김 소령이 내 방에 찾아와 “왜 최남근 중령이 풀려났느냐. 내가 올린 보고서를 보지 못한 것이냐”라고 따져물었던 적이 있다. 나는 내 서랍 속에 묻혀 있던 그 보고서를 찾아서 읽었다. 그 보고서에는 최 중령이 마산에서 구례로 향하다가 반군에 붙잡혀 가는 것처럼 위장해 지리산으로 들어가 반군 지도자였던 김지회를 만난 사실이 소상하게 들어 있었다.



그는 결국 다시 잡혀 왔다. 철저한 조사를 거쳐 그가 남로당에 깊이 간여했고, 15연대장이라는 국군 고위 장교로서 저들과 내통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의 혐의사실은 확정됐다. 재판을 거쳐 사형이 내려졌고, 결국 수색에서 처형대에 올라 짧은 생을 마감했다. 최 중령은 총살되기 직전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면서 사라졌다고 했다.



따라서 그가 진정한 사회주의자인지를 따져보는 사람이 많다. 그도 어쩌면 억울한 죽임을 당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군 연대장의 신분으로서 적과 내통한 사실이 판명된 이상 그의 구명은 불가능했다.



박정희 소령은 남로당 군사책으로 가입한 혐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활동 흔적이 없어 살아났다. 그러나 최 중령은 내 지인임에도 혐의가 너무 뚜렷하고 무거워 살리지 못했다. 가능하면 사람을 살리고 보자는 게 내 입장이다. 박정희 소령은 당시 그 어느 누구의 이목도 크게 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난 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서 우리가 세운 대한민국을 위해 일하도록 하자는 생각이 강했던 나와 그때 그 상황에서 공교롭게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인재가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해방을 맞은 뒤 막 건국한 대한민국은 그렇지 못했다. 교육을 충분히 받아 제 분야에서 실력을 발휘할 인재들이 매우 절실하게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그때의 좌익이라는 것은 유행처럼 번지던 사조(思潮)이기도 했다. 나라를 잃은 설움에다가 빈곤과 무기력함이 판쳤던 세상에서 변혁(變革)을 바랐던 젊은이들이 한때 가슴에 품기 좋은 이념이기도 했다. 남로당은 그 점을 잘 활용했고, 박 소령은 그런 남로당의 포섭에 걸려든 경우였다. 그러나 진정한 공산주의자라고는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목숨을 건졌고, 10여 년 뒤 5·16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 산업화의 기틀을 세웠다.



그 점에서 군대 내부의 좌익 색출작업도 신중을 기해야 했다. 가능하면 사람을 살리는 일 말이다. 숙군 작업이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던 무렵에 나는 이응준 육군 총참모장을 찾아갔다. 사람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군대 최고결정권자인 그를 설득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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