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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수풍댐 송전 시작 … 당시엔 동양 최대의 수력발전댐

 
  완공된 수풍댐(위)과 초기에 둑 쌓는 공사를 벌이는 모습.
 
1941년 8월 5일 수풍댐이 송전을 개시했다. 37년 식민지 조선의 총독부와 만주국이 국경 하천인 압록강 유역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하기로 합의하고, 38년 착공한 지 3년 만의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수풍댐이 완공된 것은 1944년이었다. 전기로 생산된 질소를 통해 비료를 생산했던 일본질소주식회사가 실질적으로 주도한 수풍댐 건설로 40년대 초 식민지 조선은 본국 일본보다 더 안정된 전력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수풍댐 건설은 간단한 사업이 아니었다. 사업을 주도한 조선과 만주는 서로 다른 전력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각각 60㎐와 50㎐로 사용하는 전력 주파수가 달랐다. 게다가 군부가 주도하고 있었던 만주국과 조선의 총독부 및 일본질소주식회사의 협력 역시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군국주의 사상으로 무장된 일본 군부는 정치인과 재벌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36년 만주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한 만주국의 전력 부족 문제, 그리고 만주사변 이후 만선일여(滿鮮一如:만주와 조선은 하나와 같다)를 주장했던 조선의 식민지 통치자들의 고민이 서로 맞닿는 지점이 있었기 때문에 수풍댐 건설이 이뤄질 수 있었다. 특히 조선의 식민지 통치자들은 식민지 내에서의 불만을 만주 진출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30년대 이후 최남선·박정희·최규하 등 수많은 지식인·젊은이가 희망을 찾아 만주로 건너갔고, 조선의 기업인들에게 만주는 희망의 땅이었다.

수풍댐 건설은 기술적으로도 어려운 문제였다. 수풍댐은 중력식 콘크리트댐으로 식민지 조선의 삭주군 구곡면 수풍동에서부터 안동성 관전현 갈자구(碣子溝)까지 약 900m를 연결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대공사로 댐 높이 106.4m, 체적 311만㎥ 에 이르렀다. 이 문제를 위해 기술자들을 미국에 파견하기도 했다. 서로 다른 주파수를 해결하기 위해 7개의 발전기 중 호환 가능한 발전기를 3대 설치하고, 나머지 각 2대씩을 조선 측과 만주 측 전용 발전기로 설치했다. 총 10만㎾의 발전량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수풍댐은 45년 해방 이후에 소련군이 발전기 중 5개를 약탈해 가면서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조선 전체 전기 수급의 3분의 1 이상을 담당했다. 그러나 48년 미군정 측이 전기사용료를 지불하지 않은 것을 이유로 전기 공급을 중단하면서 남쪽에서는 더 이상 수풍댐 생산 전력이 사용되지 않았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미 공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수풍댐 근처에 유엔군 포로수용소를 설치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수풍댐이 식민지 조선 전체의 대표적인 댐이었다면, 73년 12월 준공된 소양강댐은 이제 남한의 대표적인 댐이 되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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