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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중국 침략 위해 조선인의 반화교 정서 부추긴 일제

 
  1913년의 서울 을지로. 갑신정변 이후 조선의 정치와 외교를 쥐락펴락했던 위안스카이(袁世凱)의 관사는 현 롯데호텔 자리에 있었다. 주변에 중국 상인들이 포진해 한 패는 수표교 어름, 한 패는 현 을지로 일대, 또 한 패는 서소문 일대에 모여 살았다. 을지로라는 명칭은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빌려 이 일대에 새겨진 중국인의 흔적을 지우려는 뜻에서 붙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사진)
 
“이 골목을 지나갈 때에는 흡사 중국 산동성 어느 곳에 온 느낌을 가지게 된다. 길 좌우에 벌려 있는 것은 대부분 중국인의 잡화상점과 요리점 등이다…뒷골목으로 발을 들여놓으면 중국 갈보와 아편쟁이들이 맞아준다. 중국 갈보들은 값싼 백분을 낯에 새 벽 칠하듯 하얗게 바르고 입술에는 피를 바른 것처럼 빨간 연지칠을 하고서 이성에 주린 중국 남자 가슴을 호린다…이 뒷골목처럼 아편쟁이가 많이 출입하는 곳은 드물 것이다…도박으로 그날그날을 지내는 부류도 있다. 도박 끝에 싸움이 일어나게 되면 필경에는 끔찍스러운 살인 사건도 가끔 자아내게 된다. 미국의 알 카포네 일당이 이곳으로 한번 시찰을 온다 하더라도 오히려 배워갈 만한 거리가 많을는지도 모를 것이다.” 1936년 8월 어느 날의 서울 서소문 길가와 뒷골목 풍경에 대한 당시 신문기사 한 토막이다.

중국인이 한반도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다. 오늘날 한국인의 상당수가 자기 성씨(姓氏)가 중국에서 유래했다고 믿고 사는 것도 까닭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중국인이 ‘중국인’이라는 자의식을 보전하면서 별개의 집단으로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개항 뒤의 일이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淸)은 광동수사제독 우창칭(吳長慶)에게 4500명의 병사를 내주어 난을 진압하도록 했다. 이때 광둥(廣東) 상인 여럿이 우창칭을 따라 들어왔는데, 이들이 재한 화교의 비조(鼻祖)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한 뒤 많은 청상이 귀국했지만 20세기 초에는 의화단 사건과 신해혁명 등으로 뒤숭숭해진 중국 동북 지역의 정세 탓에 많은 중국인이 조선에 다시 건너왔다. 한국을 강점한 일제가 각종 토목공사를 활발히 벌인 것도 이들을 끌어들인 중요 요인이었다. 1910년 1만 명을 돌파한 재조선 화교 인구는 1936년 6만4000명으로 늘었다가 중일전쟁 이후 다시 줄었다.

만주사변 이후 일제는 한국인을 중국 침략에 동원하고자 시시때때로 반(反)화교 정서를 자극했으며, 일부 한국인들 역시 일본인에게 받은 설움을 중국인에게 떠넘김으로써 손상된 자존심을 보상받고자 했다. 1930년대에 들어 중국인을 적대시하고 조롱하는 풍조가 유행했으니, 김동인의 소설 ‘붉은 산’(1933)이나 김정구의 노래 ‘비단장수 왕서방’(1938)은 그 일부의 예였다. 한국인들이 화교를 조롱한 대가는 애꿎은 재중 한국인들이 치를 수밖에 없었다.

세계화란 우리가 세계로 나가는 것만이 아니라 세계가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도 의미한다. 우리 안의 세계를 포용하지 못하면, 우리가 용납될 곳도 줄어들게 마련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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