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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인치와 법치의 사이에서

성공은 화(禍)를 불러오는가? 우리의 대기업들이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리며 그들의 도덕성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친(親)서민 정책을 표방한 정부가 대기업의 불공정 관행에 일침을 박고 나섰다. 중소기업을 불공정하게 쥐어짜면서도 정작 투자와 일자리 창출 노력은 등한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대기업들은 억울해하는 모습이다.

현 정부는 대기업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갖고 출발했다. 대기업이 잘되면 중소기업으로도 돈이 흘러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소위 적하효과(trickle-down effect)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이런 기대가 과잉기대였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의 자료를 보면 중소기업의 원자재구매가격 대비 납품단가의 격차지수가 2007년 14p에서 2008년 24p로 악화되고 있어 양자 간의 거래관계를 짐작하게 하고 있다.

대기업의 불공정 관행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대기업 중심으로 산업화를 이룬 우리 경제가 갖는 일종의 고질병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대기업 구조를 보면 중소기업 쥐어짜기를 심화시킬 요인이 내포돼 있다. 대부분의 대기업들이 제품 혁신보다 공정 혁신에 의존하고 있으니 비용 절감을 위해 모든 것을 쥐어짜야 하는 구조다. 첨단 제품이라 할 반도체조차 설계기술중심적인 비(非)메모리 반도체보다 공정기술중심적인 메모리 반도체에 집중하고 있다. 그런 산업구조이니 투자를 해도 생산성 관련 투자일 수밖에 없고, 구매 담당 직원은 더욱더 공급업체들의 가격을 파고들 수밖에 없다. 더구나 부품조달처가 점점 세계화되니 국내 부품기업들이 받는 압력은 그만큼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사업 형태가 점점 플랫폼 기업 중심으로 바뀌고 있는 것도 중소기업의 교섭력을 취약하게 하는 요소다. 시장에 맡겨둘수록 양극화가 심화되는 구조라 할 수 있다.

이런 산업구조를 고려할 때 대기업이 알아서 중소기업과 상생(相生)을 만들어 가는 것은 대기업에 남다른 도덕심이 있지 않고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정부가 이제라도 중소기업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정부가 이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에서는 좀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워낙 고질적인 문제라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쉽지 않을뿐더러 잘못 개입하면 문제의 치유보다 시장의 왜곡만 불러오기 쉽기 때문이다.

정부의 일하는 방식은 인치(人治)와 법치(法治)로 나눌 수 있다. 인치가 사람의 주관적 판단이라면, 법치는 사회의 객관적 판단이다. 그렇기에 인치에는 유연성과 시의성의 장점이 있고, 법치에는 일관성과 예측가능성의 장점이 있다. 문제는 인치가 자의적이고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인치가 커지면 모든 사람들이 대통령의 눈치만 보게 될 것이고, 대통령이 관심을 딴 데로 돌리면 모두 그 일에서 손을 놓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인치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이다.

정부에는 그 속성상 인치와 법치가 모두 다 필요하다. 민주적 정부라 하더라도 인치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인치가 그 한계를 지키는 것이다. 불공정거래 관행의 문제를 시의적절하게 제기하고 공무원들이 이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은 인치의 길이지만, 시중에 반(反)기업 정서가 확산되도록 하는 것은 인치의 길이 아닐 것이다. 숨겨진 불공정 행위들이 드러나도록 하고 공정거래위원회가 제대로 된 공정거래질서의 수호자가 되게 하는 것은 인치의 영역이지만, 시장기능에 내포된 정당한 교섭력까지 훼손하려 드는 것은 인치의 영역을 벗어난 일일 것이다. 대기업들에 이제 공정거래질서가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면 올바른 인치일 것이지만, 공연히 재수없이 걸려들었다는 생각만 들게 하면 잘못된 인치일 것이다.

대기업의 불공정거래 문제는 중소기업 육성 이전에 시장경제의 근본에 관한 문제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보다 먼저 쓴 것이 『도덕감정론』이었다. 그는 거래의 균형(공정성)이 당사자의 사리분별, 엄격한 정의(법의 준수), 적절한 자비심 없이는 이뤄지기 어렵다 하였다. 공정한 질서, 적절한 자비심을 상실한 경제가 번영할 수는 없는 법이다. 더구나 지금 세계경제는 생태계 대 생태계의 전쟁이 되고 있다. 생태계가 경쟁력을 가지려면 상생이 전제돼야 한다. 공정성 없이는 상생이 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일이 일과성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인치를 올바르게 펼칠 지혜도 갖기를 바란다. 그래야 인치(人治)가 인치(仁治)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홍규 KAIST 교수·경영과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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