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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미당·황순원 문학상 본심 후보작 지상중계 ①

한국 문단의 거봉인 미당 서정주(1915~2000)와 황순원(1915~2000)을 기리는 미당·황순원문학상이 10년째를 맞았습니다. 올해 본심 후보(작)를 지상중계합니다. 지난 1년 동안 발표된 최고의 시편과 단편소설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시인·소설가 이름의 가나다 순서에 따라 모두 1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지금, 여기’ 우리 문학의 풍성한 수확을 맛보실까요. 올해의 수상자를 예감하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30년 묵은 사유, 이제 풀어놓겠다
시-고형렬 ‘애채들이 우는 지문의 기억’ 외 27편


고형렬 시인은 “내 시에서 방향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든 삶이든,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까지 가파르게 깨어나고 싶다”고 했다. 그 노력의 결과가 이번 후보작 시편들이다. [박지혜 인턴기자]
중견 시인 고형렬(56)씨는 오랫동안 창비 시선집의 편집위원으로 일하다 2008년 은퇴해 경기도 양평에서 산다. 전업시인인 그는 요즘 시에 전력투구한다. 2000년 여름 그가 창간한 시 전문 계간지 ‘시평’은 올해로 만 10년을 채웠다. 고씨는 “잡지를 통해 아시아 여러 나라의 시를 활발히 소개하다 보니 덩달아 내 시 공부가 많이 됐다”고 말한다.

이런 노력 때문인지 고씨의 후보작들은 예심에서 평가가 좋았다. “작품들 사이에 편차가 별로 없다. 고씨 생애에서 가장 훌륭한 한 해인 것 같다”는 상찬까지 나왔다.

그럼에도 고씨의 작품은 편안하게 읽히는 서정시와는 거리가 있다. 상상력이 낯선 데다 언어는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어느 시상하부의 번연계의 화석화’에서는 ‘R-영역’같은 생물학 전문용어가 등장한다. 인간 심층심리의 공격본능을 얘기하기 위해서다.

고씨 스스로 ‘전문(全文) 소개용’으로 꼽은 ‘애채들이…’만 해도 ‘애채’‘눈록’‘몰록’같은 시어부터 걸린다. 애채는 ‘새로 돋은 나뭇가지’, 눈록은 ‘새 잎의 연한 녹색’을 뜻한다. 순우리말이다. 몰록은 ‘불쑥’‘갑자기’를 뜻한단다.

시 해설을 부탁하자 고씨는 “갑작스럽게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을 표현했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시는 뼈대 위에 근육과 혈관이 입혀져 온전한 육체가 되는 성장 혹은 진화의 긴 과정을 순식간에 압축해 보여주는 SF영화의 한 장면 같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고씨는 “한편으로는 단순한 재규어 탄생에 대한 시가 아니라 언어에 대한 생각을 담은 시”라고 말했다. 새로운 언어가 태어날 때 감각의 놀라움을 상상해 쓴 시라는 것이다. 고씨는 “30년 넘게 시를 썼다. 이제는 전방위적인 사유를 거리낌 없이 풀어놓고 싶다”고 했다. 그 변화의 방향은 언어를 징검돌 삼아 시인과 시적 대상 모두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박지혜 인턴기자

애채들이 우는 지문의 기억

허공의 그대가 살며시, 땅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눈록들은 전율한다
신이 툭, 히말라야에 던져놓은 재규어
돌이 발에 닿는 순간, 눈이 열리고
그 눈을 찢은 영혼은 갑자기 태어났다
모래를 심장에 전하던 백만분의 찰나
짧은 정강이 아래 봉합된 발바닥
지평선과 대칭한 복부의 곡선과 음부
그 안에 걸려 있는 복잡한 장기들
왜 그것들이 꼭 있어야만 했는가
꽉 다문 입처럼 강인한 항문의 괄약근
그 위를 뛰어가는 한주먹의 흰 돌들
만약 스스로 존재한다 할지라도
누가 저 재규어를 상상할 수 있을까
등골을 타고 성기를 가린 긴 꼬리
호랑가시나무 잎사귀가 뒤덮인 혓바닥
사쁜, 검은 바람의 호명이 되던
헤아릴 수 없는 그 세월, 몰록 흐른 뒤
지구 밖의 허공 속 벼락을 쥐고
공전궤도를 우두커니 서 있는 그림자
마지막 재규어는 지금 어디 있는가
살며시 지구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아 한 묶음 꽃의 울음이 터져나왔다
 
<현대문학 2010년 5월호 발표>


◆고형렬=1954년 강원도 속초 출생. 7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김포 운호가든집에서』『밤 미시령』 등.



지쳤지만 그래도 싸운다, 이 삶
소설-강영숙 ‘어떤 싸움’


소설가 강영숙씨는 “여태까지 소설가를 직업의 하나로 여겼는데 지난해 미국의 아이오와대 국제창작프로그램에서 외국작가를 만나보니 그들은 글쓰기를 즐긴다는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는 유쾌한 작품을 쓰고 싶다”고 했다. [박지혜 인턴기자]
소설가 강영숙(44)씨는 살면서 상처 입고 고통 받아 비관적이 된 사람들을 주로 그려왔다. 상처와 고통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2002년 첫 번째 소설집 『흔들리다』에는 경쟁과 반복을 무섭게 강요하는 자본주의적 삶에서 퉁겨져 나간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다방 주방에서 일하며 가출한 딸을 찾아 헤매는 어머니, 백수였던 남편과 헤어진 뒤 고속도로 여행에서 위안을 얻는 여자 같은 변두리 인생들이다. 지난해 출간한 세 번째 소설집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에서는 쓰나미 같은 자연재해, 실연(失戀) 등이 상처, 고통의 원인이었다.

올해 후보작 ‘어떤 싸움’은 그런 강씨 작업의 연장선상에 놓이면서 변화도 보여주는 작품이다. 단지 ‘여자’와 ‘남자’로 불리는 두 주인공이 삶에의 의지를 상실한 절망적인 인간들이면서도 소설 막바지, 둘의 교제 가능성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낙관적인 전망이 있는 것이다.

여자는 병적인 환상에 시달린다. 아무리 경치 좋은 곳에서도 눈을 감으면 자신이 칼로 다른 사람을 난자하는 장면 같은 끔찍한 환상이 찾아온다. 사람을 만나는 건 더 싫다. 오랜 만에 만난 친구들이 남편과 자식 얘기에 열 올리자 입 다물고 있다가 이를 걱정한 친구가 이튿날 전화하자 일갈한다. “너희들은 결혼해서 살 만한 모양인데, 난 너네 같은 무식한 가족 이데올로기 신봉자들과는 상종하고 싶지 않으니까 다신 전화하지 마.” 여자는 호기심 때문에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게 살인보다 나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할아버지가 남긴 수십 억대의 부동산을 챙길 기회마저 제 발로 차버린다. 여자는 정장 차려 입고 예술영화 보는 게 유일한 낙이다.

남자는 사정이 더 심각하다. 기업체 부장으로 일하며 부하 여직원에 연심을 품는 등 한때는 정상적이었지만 지금은 회사를 그만 두고 죽음을 대비하고 있다. 남자는 죽을 병에 걸린 듯하다. 진작에 주변 정리를 끝내고 역시 영화를 보러 다닌다. 갑자기 죽었을 때 신원확인을 위해 주민등록증을 항상 챙긴다.

둘은 영화관에서 만난다. 하지만 관계는 좀처럼 진전되지 않는다. 연애에 성공하더라도 불꽃이 튈 것 같지는 않다. 그렇더라도 둘이 만난다는 사실만으로 희망적이다.

예심 심사를 한 문학평론가 정홍수씨는 “소설 제목의 싸움을 삶에 대한 욕망으로 본다면 소설은 두 사람이 다시 살아갈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평했다. 싸움의 대상을 일상 또는 삶으로 볼 때 죽을 준비를 하는 남자는 이미 싸움에서 패한 사람이다. 반면 여자는 아직 싸우는 중이다. 싸움은 물론 지지고 볶다 조만간 권태로운 일상으로 전락할, 두 남녀의 ‘사랑싸움’도 가리킨다.

강씨는 “우리는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 그가 겪은 시간이나 사건보다 겉모습에 끌린다”며 “고요하게 상대방을 지켜보고 배려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에 소설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박지혜 인턴기자

◆강영숙=1966년 춘천 출생. 9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흔들리다』『날마다 축제』『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 장편소설 『리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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