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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군대 해산당한 대한제국, 망국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착검한 총을 들고 도열한 대한제국의 군인들. 이들은 1907년 8월 1일 군대해산의 그날 4시간 동안 벌어진 남대문 인근 시가전에서 프랑스 일간지 ‘일뤼스트라시옹’이 “일인마저 경의를 표하고 상찬(賞讚)했다”고 보도할 만큼 일본군에 죽음으로 맞서 싸웠다. (사진출처 :『사진으로 엮은 한국 독립운동사』, 눈빛, 2005)
 
“한황(韓皇)으로 하여금 황태자에게 양위(讓位)하게 할 것. 장래의 화근을 두절시키기 위해서는 이 수단 외에 나올 것이 없음. 통감은 부왕(副王) 혹은 섭정의 권한을 가질 것.” 1907년 7월 12일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을 황제의 권좌에서 밀어내고 내정 관할권을 쥐라는 지령을 받았다. 강제 양위 이틀 뒤인 7월 24일에 강제로 맺은 ‘정미 7조약’을 통해 행정권과 사법권까지 장악한 이토는 허울만 남은 대한제국의 군대를 없애 군사권까지 앗으려 했다. 그때 이토는 이 땅의 실질적 제왕이었다. “조선군대는 황궁 호위를 위해 일개 대대를 남기고 전부 해산한다. 앞으로 징병법을 반포하여 힘 있는 군대를 조직하는 것을 요건으로 한다.” 28일자로 총리대신에게 보낸 전문은 3일 뒤 내려진 군대해산을 명하는 조칙이 순종의 뜻이 아니었음을 명증한다. “짐은 이제부터 군사 제도를 쇄신할 생각 아래 사관(士官)을 양성하는 데에 전력하고 뒷날에 징병법(徵兵法)을 발포(發布)하여 공고한 병력을 구비하려고 한다. 짐은 이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황실을 호위하는 데에 필요한 병력을 남기고 나머지는 일시 해산시킨다. 군대를 해산할 때 인심이 동요되지 않도록 예방하고 혹시 칙령을 어기고 폭동을 일으킨 자는 진압할 것을 통감에게 의뢰하라” (『순종실록』 1907년 7월 31일조).

군대해산의 조칙이 내려지기 하루 전인 7월 30일 일제는 전국 요지에 주둔하고 있던 제13사단을 서울로 불러 올리고 제12여단 병력을 대구·대전·용산·평양 등에 증파해 군대해산이 몰고 올 저항에 대비태세를 갖췄다. 8월 1일 오전 10시. 동대문 밖 훈련원 연병장에 도열한 대한제국 군인들을 겹겹이 에워싼 일본군은 그들의 무기를 빼앗고 군모와 계급장까지 앗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적 앞에 무릎 꿇지 않았다.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 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 시위대 제1연대 1대대장 박승환(朴昇煥·1869~1907)이 권총으로 자결하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이 웅변하듯, 그들은 우세한 화력의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죽었다.

8월 5일 원주 진위대를 필두로 지방 주둔 군인들도 일제에 맞서 저항의 총구를 높이 들었다. 이후 의병들 속으로 들어간 대한제국의 군인들은 이 땅 방방곡곡에서 벌어진 의병전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스스로를 지킬 힘을 앗긴 나라는 군대해산의 그날 이미 죽었다. 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오늘.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면, 제국의 황혼을 핏빛으로 수놓은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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