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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배를 띄우기도 때론 배를 뒤집기도 … 민심의 바다는 반드시 ‘오만’을 심판한다

“민심은 바다와 같아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다.”

지금껏 많은 정치인이 금언으로 삼는 말이다. 근래에도 한나라당 김무성 원내대표는 물론이고 오세훈 서울시장, 안희정 충남지사가 공개적으로 한 말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민심이 무섭다는 뜻이다.

7·28 국회의원 재·보선 직후에도 이 얘기가 나온다. 6·2 지방선거로부터 불과 57일 만에 민심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표출됐기 때문이다. 6·2 민심은 민주당에 압도적인 승리를 안겼다. 당시엔 천안함 사태, 세종시 추진 등에 대해 젊은 층의 여론이 크게 나빴었다.

반면 7·28 민심은 한나라당 쪽에 섰다. 지방선거 직후 치러지는 국회의원 재·보선에선 지방선거를 이긴 정당이 승리하거나(2002·2006년), 선전한다(1998년)는 과거의 경험칙이 통하지 않은 것이다. 7·28 결과는 1999년 이래 처음으로 여당에 승리를 안겨줬기 때문에 ‘여당의 재·보선 필패’ 법칙이 일단 깨진 상황이다.

숭실대 강원택(정치외교학) 교수는 “6·2 지방선거는 한나라당의 독주와 권력 집중에 대한 민심의 심판이었다”며 “이번 재·보선 결과는 ‘지방선거에서 우리가 잘해서 승리했다’는 민주당의 착각과 그로 인한 대여 공세에 대해 민심이 거부감을 표출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민심은 결국 오만한 쪽을 심판했다”는 것이다.

◆민주당 등 진보 진영의 독주=민주당의 분석도 유사하다. 이종걸 의원은 “6·2 지방선거를 민주당의 승리라고 자축하고 오만하더니 (이번에) 침몰하고 좌초했다”고 말했다.

‘오만’의 양태에 대한 지적은 다양했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공천을 안이하게 했다”며 “인물 경쟁력이 부족한 후보를 내세운 게 패인 중 하나”라고 말했다.

우상호 대변인은 “서울 은평을에서 후보 단일화를 했는데도 패배한 게 뼈아프다. 투표가 임박해서 단일화가 진행됐을 때 효과를 크게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단일화가 늦어진 걸 한탄했다. 박주선 최고위원은 대안 정당으로서의 능력 부재를 지적했다. “정부·여당의 실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무기력한 야당, 유효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야당, 특정 정치세력이 중심이 된 폐쇄적인 야당이란 게 민심의 평가였다. ‘반사이익 정당’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 게 패인”이라고 했다.

야당으로서 치열함이 부족하지 않았느냐는 반성도 나왔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지난해 재·보선과 6·2 지방선거에선 이기기 위해 치열하게 선거운동을 했는데 이번엔 그러지 못했다”며 “80명이 넘는 소속 의원 중 8개 재·보선 지역에 코빼기도 한 번 비치지 않은 의원이 20명이 넘는다는 게 그 증거”라고 말했다.

6·2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당 소속 지방자치단체장과 진보 성향의 교육감들이 과욕을 부리거나, 무리하게 일을 추진한 것도 민주당 표를 떨어뜨리는 요인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박 원내대표는 “성남시장이 모라토리엄(채무지급유예)을 선언했는데 그런 것들이 국민에겐 오만하다는 인상을 줬을 수 있다”고 했다.

◆민심의 무서움=과거에도 민심은 종종 ‘배를 뒤집곤’ 했다. <그래픽 참조>

YS(김영삼)는 1990년 통일민주당을 이끌고, 노태우 대통령의 민정당과 JP(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합당했다. 그 결과 의석 218석의 거대 여당인 민자당이 탄생했다. 하지만 92년 총선에서 민자당은 149석밖에 얻지 못했다. 3당 합당 이후 계속된 당내 갈등과 인위적 정계개편에 대해 민심이 거부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DJ(김대중)도 공동정부를 꾸렸던 JP를 2001년 사실상 내치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2004년 3월 거대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최병렬 당시 대표 주도로 노무현 당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서 처리했다가 거센 역풍을 만났다.

그리고 한 달 뒤 총선에서 대패했다.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됐을 땐 “영남에서 겨우 40~50석만 건져도 성공”이란 얘기가 나왔으나 박근혜 당시 대표가 서울 여의도광장 건너편의 공터에 ‘천막당사’를 세우고 “개헌 저지선(100석)만 달라”고 읍소하고 다녀 겨우 121석을 건졌다.

총선 이후 헌재가 국회의 탄핵소추를 기각하자 노 대통령은 국가보안법 폐지 드라이브를 거는 등 한나라당을 상대로 분풀이를 했다. 그걸 본 민심은 집권 측이 오만해졌다고 느꼈고, 바로 표로 응징했다. 노 대통령이 국정에 복귀한 뒤 치러진 각종 재·보선에서 집권당이던 열린우리당은 야당인 한나라당에 연전연패했다. ‘40(한나라당):0(열린우리당)’이란 기록은 이때 세워졌다. 박근혜 전 대표에게 ‘선거의 여왕’이란 별명이 붙은 건 당시 한나라당 연승의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고정애·백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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