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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42) 숙군의 첫걸음

가을은 수렴(收斂)의 계절이다. 생명이 대지의 기운을 타고 움을 틔워, 뜨거운 태양 아래 결실을 맺은 뒤 숙성(熟成)을 거쳐 종내 차가움 속으로 사라지기 전의 단계다. 벌어졌던 모든 것을 안으로 끌어들여 내실을 꾀하는 가을의 기운에 맞춰 우리 군이 진행했던 것은 숙군(肅軍)이었다.

차가운 기운이 나무와 풀 등을 비롯한 모든 식생(植生)의 기운을 말리는 게 숙살(肅殺)이다. 군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좌익의 기운을 몰아내고 새로운 조직으로 거듭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이를테면 숙살과 같은 작업이 숙군이었다.

국군 창설 초기의 병영 모습. 병사들이 검열을 받기 위해 막사 앞에 총기를 세워 놓고 정렬해 있다. 당시 국군은 좌익의 침투로 혼란스러웠다. [미 육군부 자료]
1948년의 가을은 그런 점에서 적절하게 찾아왔다. 이응준 총참모장의 집으로 나와 신상철 헌병사령관이 찾아간 때는 늦은 밤이었다. 밤중에 “내 집으로 오라”는 이 총참모장의 느닷없는 전화를 받은 나와 신상철 사령관은 캄캄한 거리를 지나 서울 안암동의 이 총참모장 집에 도착했다. 이 총참모장이 왜 우리를 부르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의 방에 들어섰을 때 총참모장의 어두운 얼굴이 보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먼저 탁자 위에 있는 보따리 하나를 가리켰다. 제법 분량이 많아 보이는 문서가 그 안에 가득 들어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 총참모장은 “대통령께서 내려보내신 문서”라고 말을 꺼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강의 경위는 이렇다. 먼저, 이 대통령은 당시 경찰청 김태선 치안국장으로부터 큰 보따리를 하나 받았다.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군대 내부의 남로당 조직원 리스트였다.

이 보따리를 건네받아 살펴본 이 대통령은 화가 단단히 치밀어 올랐다.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로버트 미 군사고문단장을 경무대로 불러들였다. 이 대통령은 로버트 단장에게 “이게 다 당신들이 불러들인 일”이라며 “미군정이 국방경비대(국방부 전신) 모집 때 군 요원을 아무런 검증 절차 없이 선발하면서 이렇게 군대 내부에 좌익을 키웠으니 당신들이 알아서 처리하라”면서 보따리를 던지다시피 건넸다고 한다.

로버트 단장은 보따리를 받은 뒤 늦은 밤에 이응준 총참모장을 찾아 대책을 협의했고, 급기야 이 총참모장은 늦은 밤중에 우리를 불러들인 것이었다. 이 총참모장은 “아무래도 당신 두 사람이 비밀리에 숙군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제주 4·3 폭동에 이어 전남 여수와 순천에서 14연대가 반란을 벌이는 사건 등이 이어지자 갓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는 그해 12월 1일자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해 공포했다. 법률적인 근거가 마련됐으니 대한민국 존립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좌익을 정리하는 작업이 당연히 뒤를 따라야 했다.

나는 국방부 정보국장으로서 그 작업의 선두에 서게 된 셈이었다. 이응준 총참모장 집으로 함께 찾아간 신상철 헌병사령관은 혐의자로 지목된 사람을 체포해 데려오는 작업을 맡아야 했다. 나는 보따리를 송두리째 들고 왔다. 서류를 받아서 펼쳐 보면서 나는 놀라고 말았다. 모든 명단을 다 들여다보지는 못했지만 대충 들춰 본 서류에 적혀 있는 이름들이 내게는 전혀 낯설지 않은 사람들의 것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일을 시작해야 할까. 가려내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아직 혐의만을 받고 있는 상태일 뿐이다. 방대한 조사와 검증 작업이 따라야 했다. 그러나 정보국 인원만으로 그 작업을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정보국 내에서 군대 좌익을 색출하는 작업을 담당하는 인물로는 베테랑 수사관이었던 김안일(예비역 육군 준장) 방첩과장이 적임자였다. 서울 태릉에 주둔하던 1연대의 정보주임이었던 김창룡(육군 중장 추서) 대위도 가담했다. 그러나 조사 대상자가 너무 많아 인원 충원이 필요했다.

조사를 담당할 인력은 당시 경찰 외에는 없었다. 경찰 정보 계통에서 일해 온 이희영·김진구·이각봉·박평래·김안희·정인택·허준·장복성·노엽·이진용·이한빈·빈철현씨 등을 데리고 왔다. 이들 중 상당수는 경찰에서 군인으로 신분을 바꿨다. 본격적인 숙군 작업을 위해서는 이들이 정식으로 군문에 뛰어들어 열정과 성의를 다해 줘야 했기 때문이다.

경찰의 김태성 치안국장이 건넨 ‘보따리’는 거저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오랫동안 치안을 담당하면서 은밀하게 추적해 온 경찰이 노력을 기울인 산물이었다. 좌익의 뿌리와 가지에 얹혀 있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하나 둘씩 불려오다가, 일이 진행되면서 그 규모가 커져갔다.

이들을 수용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영등포의 창고중대가 사용하던 빨간 벽돌집을 임시 수용소로 확보했다. 규모가 점차 커지고 불려오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면서 내가 머물고 있던 명동의 옛 증권거래소 안 정보국 사무실은 대한민국의 이목이 집중되는 장소로 변했다.

증권거래소 건물 3층에 내 사무실이 있었고, 2층은 헌병대 사무실이었다. 3층에서 내려간 지시에 따라 2층의 헌병대가 좌익으로 지목된 사람들을 체포하는 식이었다. 증권거래소 지하에는 별도의 영창이 있었다. 영등포 창고중대에 수용되는 사람들보다 좌익 연루 혐의가 더 짙은 사람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조사를 기다려야 했다. 조사는 아주 빠르게 펼쳐졌다. 48년 12월에 시작한 숙군 작업이 두 달째 접어들고 있을 무렵이었다. 방첩과장 김안일 소령이 퇴근 무렵에 있던 나를 사무실로 찾아왔다. “저, 잠깐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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