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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현의 시시각각] “Don’t Miss Out”

“Don’t Miss Out”

이재오 당선인(서울 은평을)은 재작년 4월 총선에서 떨어지고 한 달 보름 후 미국으로 떠났다. 존스홉킨스대 객원교수로 지내다 작년 3월 29일 귀국했다. 미국 체류 시절 그는 워싱턴 DC의 숙소에서 학교까지 자전거로 출퇴근했다. 늘 지나다니는 동네 큰길가에서 아파트 공사가 시작됐다. 공사장 앞에 붉은 글씨로 쓴 광고판이 나붙었다. “Don’t Miss Out”.

이재오는 민주화운동에 매진하다 1973년 처음 투옥돼 89년까지 모두 5차례, 10년간 교도소 신세를 졌다. 혹독한 고문을 수없이 당했다. 감옥에서 시간도 보낼 겸 영어·독일어·일어 원서를 상당히 읽었지만, 생생한 현지 생활영어에는 아무래도 약했다. 돈 미스 아웃? 그는 ‘미혼여성은 밖으로 나가지 마라’, 또는 ‘미혼여성은 동네에 들어오지 마라’라는 뜻이 아닐까 추측했다. 아리송해하다 미국에 오래 산 지인에게 물어보았다. 지인이 껄껄 웃으며 가르쳐주었다. “이 아파트는 참 좋으니 놓치지 말고 꼭 지켜보고 가라는 뜻입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 6개월 만에 이재오는 국민권익위원장에 임명됐다. 대선 막바지이던 2007년 11월 한나라당 내분의 책임을 지고 수석최고위원직에서 물러난 지 22개월 만의 공직 복귀였다. 특유의 ‘바닥 민심을 훑는’ 뚝심은 권익위원장 시절에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그리고 이번 7·28 재·보궐선거. 그는 한나라당을 향해 “한강을 넘어오지 말라”고 쐐기 박은 뒤 혼자 힘으로 선거를 치러 국회의원직 복귀에 성공했다.

이재오의 굴곡진 역정을 지켜보노라면 경제학자 케인스가 기업가의 덕목으로 언급한 ‘애니멀 스피릿(animal spirit·야성적 충동)’이 떠오른다. ‘가만히 있기보다 행동에 나서려는 자생적 충동’이다. 이성과 합리를 뛰어넘는 동물적 감각이자 자기 희생을 마다 않는 용기다. 경제인의 애니멀 스피릿이 세계적인 기업을 일구는 원동력이라면, 정치인의 애니멀 스피릿은 민심을 꿰는 감각과 소통 능력에서 출발한다. 무엇보다 잡초 같은 자생력(自生力)과 뚜렷한 주관이 있어야 한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렇지 않았던가. 최근의 선거판만 놓고 보면 이 당선인이나 김문수·이광재·안희정 같은 정치인에서도 애니멀 스피릿의 원형이 엿보인다. 공교롭게도 모두 포시럽게 자라지 못한, 가시밭길을 아는 재야권 출신이다. 이재오만 해도 칡뿌리와 소나무 껍질로 배를 채우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수배 중이던 신랑은 다시 정처 없는 도피의 길을 떠났고, 신부 혼자 형사들이 죽치고 기다리던 서울 불광동 단칸방에 돌아왔었다.

그런 이재오가 여의도에 돌아왔다 해서 다들 ‘왕의 남자’의 귀환이라며 난리다. 어떤 이들은 반기고 어떤 이들은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다. 한나라당은 이런저런 악재로 어수선한 탓에 “게젤샤프트(Gesellschaft·이익사회)의 약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조롱까지 받고 있다. 나는 사회부 신참 기자 시절 만난 이재오 서민련(서울민중연합) 의장이 재야단체 간 밤샘회의를 마친 뒤 “이 바닥(재야)도 지역감정이 얼마나 심한 줄 아세요? 정말 우리나라 큰일이에요”라며 한숨을 토해내던 것을 기억한다. 민중당 사무총장 시절, 젊은 기자가 사주는 순댓국을 얻어먹으며 “미안하다. 그러나 부정한 정치자금을 만들 수는 없다”고 겸연쩍어하던 모습도 떠오른다. 그런 그가 이익을 좇아 뭉치고 흩어지는 여당 체질에 일대 쇼크를 가해주면 좋겠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지금 이재오 당선인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역시 ‘소통’이다. 한나라당 내, 그리고 여야 간 동맥경화부터 풀어야 한다. 첫 순서는 ‘독재자의 딸’과 ‘오만의 극치’를 주고받으며 심각하게 틀어졌던 박근혜 전 대표와의 소통이요 화해일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 체류 시절의 “Don’t Miss Out” 오역(誤譯)은 아마 오역이 아닐지 모른다. “박 전 대표를 함부로 내치지 말라”는 예언적 경구일 수도 있으니까. 

노재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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