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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 중국의 말사스 馬寅初


얼마 전 山東省에 갔다가 현지인과 이야기 끝에 산동성 인구가 1억이 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산동성이 중국에서 인구 最多省이냐고 물었더니 인근의 河南省 다음이라고 한다. 한국과 지리적 및 경제적으로 가장 가까운 산동성의 인구가 7천만정도로 알았는데 벌써 1억이 넘었고 실제로는 1억2천만정도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산동성의 농촌 담벼락 곳곳에 쓰여 있는 “生育計劃(가족계획)” “少生優生”(적게 낳아 잘 기르자)의 구호가 무색해 보인다.
秦始皇이 천하를 통일(BC221)했을 때 중국인구는 1천만 정도였다고 한다. 그후 漢이 건국되고 서력기원(AD)이 되었을 때는 인구가 급격히 늘어 6000만이 되었다. 중국은 전란과 질병으로 인구는 크게 늘지 않고 明代末까지 8000만정도로 유지되었다. 중국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 난 때는 淸朝 200년간이었다. 특히 康熙 乾隆盛世의 100여년간 인구가 배 이상 늘어 2억이 되었는데 이러한 추세는 아편전쟁 때까지 이어져 1840년대 말에는 이미 5억4천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후 100년간은 태평천국의 난, 군벌의 혼전, 항일전 그리고 국공내전으로 인구는 거의 늘지 않아 1949년 신중국 건국 당시 인구통계를 보면 중국인구는 5억5천만으로 100년전에 비교하여 변화가 없었다.
건국 후 1957년까지 국가의 안정으로 인구는 매년 22% 증가되어 6억5천만이 되었다. 이러한 인구의 급작스러운 증대에 인구폭발을 감지한 사람은 北京大의 馬寅初총장이었다. 중국의 말사스(Malthus)로 통하는 그는 1957년 “신인구론”을 제창 철저한 가족계획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毛澤東등 중국의 지도자들은 “자녀는 많을 수록 좋다(多子多福)” “인적자원도 국력이다(人多力量多)”라는 생각으로 가족계획을 반대하였다. 공업기술과 군사기술이 낙후된 중국은 사람이라도 많아야 벌충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馬寅初총장도 뜻을 굽히지 않자 결국 그는 北京大 총장직에서 해임되었다.
1979년 개혁개방과 함께 馬寅初의 인구정책이 재검토되어 그 타당성이 인정되었다. 중국의 “한 자녀 낳기 운동”이 시작된 때가 그 무렵이었다. 1957년부터 1979년까지 多産의 20여년간 대략 3억의 인구가 늘어 나 중국의 인구는 10억을 육박하고 있었다.
浙江省 紹興의 한 양조장 주인의 아들로 유복한 가정에 태어난 馬寅初는 가업을 이어 받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미국에 유학 예일대학과 컬럼비아대학에서 수학 경제학자가 되었다. 귀국하여 蔡元培 北京大총장의 권유로 北京大 경제학교수로 부임하였고 신중국 건국후는 周恩來 총리의 천거로 北京大學 초대총장이 되었다. 그러나 “신인구론”이 채택되지 않자 野人으로 물러나 있다가 명예 北京大총장으로 복권되어 1982년 만100세를 1개월 앞두고 서거하였다.
馬총장은 생년월일시의 四柱가 모두 12간지의 말(午)로 馬氏姓과 함께 5馬가 되는 예사롭지 않은 운명을 띄고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중국의 가족계획을 주장했지만 그 자신은 두 부인에서 7명의 자녀를 둔 다산가족이었다. 또한 그는 양조장 아들이면서 술은 한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던 것으로도 유명하였다.
2012년이면 馬寅初 탄생 130주년 서거 30주년이 된다. 중국의 말사스 馬寅初의 인구재난 경고가 없었더라면 지금 중국인구는 20억이상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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