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37) 소령 박정희

이범석 국방부 장관은 채병덕 국방부 참모총장에게 “선견대(先遣隊)를 인솔해 현지로 내려가 사태를 파악한 뒤 급한 조치를 먼저 취하라”고 지시했다. 채 총장과 정일권 육군참모부장, 나와 짐 하우스만 대위, 존 리드 대위와 정보국 통역관으로 있던 고정훈(중령 예편, 후일 민주사회당 총재 역임) 중위 등으로 선견대를 꾸렸다. 우리는 곧바로 김포비행장에서 C-47 수송기 편으로 광주를 향해 날아올랐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작은 키 … 토벌 사령관이 데려온 참모는 불만스러운 표정에 말이 없었다 그가 박정희 소령이었다

광주 5여단장인 김상겸 대령이 우리를 마중하기 위해 비행장에 나와 있었다. 그는 10월 11일자로 제주도 경비사령부 사령관을 겸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자신의 예하 부대인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는 그 사건으로 해임됐다.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폴란드군 출신이었으며 아내도 폴란드 사람이었다.



채 총장은 바로 서울로 돌아갔다.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고 보고 서울로 돌아가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21일에는 정일권 부장도 서울로 돌아갔다.



당시 상황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대목은 38선 동향이었다. 그곳의 경계를 강화해 북한 군대가 움직이는 것에 대비해야 했다. 현장에 남은 나는 정보국장 자격으로 일선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보면서 판단을 해야만 했다.



한국 언론에 처음 등장하는 1948년의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이다. 여수와 순천에서 발생한 14연대 반란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간 박정희 당시 소령(맨 왼쪽)이 작전 사령관이었던 송호성 준장(1889~1959·왼쪽에서 둘째)과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작전을 구상하고 있다. 오른쪽은 작전 지원을 위해 광주에 도착한 미 24군단 장교들. 당시 작전을 지휘했던 송 준장은 6·25전쟁이 터진 뒤 서울에서 납북돼 인민군 사단장을 지내는 기구한 운명을 맞게 된다. 미 종군기자 칼 마이던스(1907~2004)가 찍은 사진으로 라이프지에 실렸다.
육군총사령관 송호성 준장이 토벌 사령관에 임명돼 21일 광주로 날아왔다. 그는 원용덕 대령이 이끄는 2여단 예하의 군산 주둔 12연대와 대전 주둔 2연대, 김상겸 대령의 후임으로 새 자리에 오른 김백일 대령의 광주 5여단 예하 4연대(광주 주둔)와 3연대(전주 주둔)의 병력을 순천 지역으로 급파했다.



나는 송호성 사령관을 수행해 함께 광주로 내려온 진압팀과 합류했다. 주로 작전을 구상하면서 병력 이동 등을 지휘했다. 송 사령관과 함께 내려온 사람이 적지 않았다. 나와 6·25전쟁 뒤까지 늘 함께했던 김점곤 소령은 당시 전투정보과장으로 내 부탁을 받아 작전지도를 한 아름 싣고 내려왔다. 그중에는 낯선 사람이 하나 섞여 있었다. 박정희 소령이었다. 10여 년이 흐른 뒤 5·16을 거쳐 18년 동안 권좌에 머물며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이룬 미래의 대통령 박정희였다.



심흥선(육군 대장 예편, 총무처 장관 역임)·한신(육군 대장 예편, 내무장관 역임) 소령, 이수영(대령 예편, 외무차관 역임) 소위 등도 있었다. 그중에서 박정희 소령은 내가 자주 만난 사람은 아니었다. 처음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니면 한두 번 어디선가 마주쳤지만 제대로 인사를 나눈 적이 없던 인물이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작은 키, 그리고 과묵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말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박정희 소령이 토벌 사령부에 합류한 것은 송호성 사령관 때문이었다. 20일 오후에 이범석 장관이 송 장군을 불러 토벌을 지시하자 송 사령관은 박 소령과 한신 소령을 데려 오도록 지시했다. 이들은 총사령부에 근무하고 있던 신분이 아니라서 별도의 인사발령을 내야 했다. 박 소령은 춘천의 8연대에서 연대 작전 보좌관으로 있으면서 작전 계획을 잘 짠다는 평판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선발됐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송호성 사령관은 광복군 출신으로 뒤늦게 육사 전신인 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대해 같이 입교했던 박정희·한신과는 친분이 있던 사이였다. 그런 인연 때문에 박정희 소령은 광주 토벌 사령부에 내려와 나와 함께 지내게 됐다.



당시에는 경황이 없던 때라 박정희 소령과 무슨 말을 어떻게 나눴는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나는 매시간 들어오는 반란군 정보에 귀를 기울이다가,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진 뒤에는 미군 고문관들과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상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박정희 소령은 주로 송호성 사령관과 작전을 논의했다. 그러나 당시 전체적인 맥락을 잡은 뒤 작전을 펼쳐가는 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쪽은 미 임시군사고문단(PMAG)이었다. 미 군사고문단을 대표해 광주에 내려온 사람은 하우스만 대위였다.



정보국장인 나, 하우스만 대위, 그리고 정보국에서 나를 보조했던 리드 대위 등이 작전을 주로 협의했다. 송호성 사령관은 작전의 세밀한 부분에 대해 잘 간여하지 않았다. 현지에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반군의 행렬을 어떻게 막고 반격을 펼칠 것인가에 대해 명확한 구상이 있지 않다는 인상을 풍겼다. 박정희 소령의 역할도 따라서 기대만큼 크지 않았다. 게다가 박 소령은 당시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그래서 미군과 함께 논의하는 작전계획에는 잘 끼어들지 않았다. 그는 한쪽 구석에 늘 말없이 앉아 있기 일쑤였다. 과묵함이 지나쳐 때로는 뭔가 불만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테이블 한 구석을 조용히 지키고 있기만 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