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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준 기자의 ‘빨치산루트’ ④ ·끝 전북 순창 회문산

#여러 산과 물이 감싸주는 산



빨치산은 사라졌다 … 그들이 들었던 산은 남아, 말 없이 역사를 말한다

1950년 9월 하순, ‘모든 인민군은 춘천으로 집결하라’는 최고사령부의 지시를 받은 인민군은 북으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전쟁 초기, 잠깐의 ‘해방’을 맛봤던 조선노동당의 각 도당은 다시 빨치산 활동으로 돌아섰다.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까지 흡수해 후방의 ‘제2전선’을 형성했다. 전북도당(위원장 방준표)은 전주에서 여분산(엽운산·774m)으로, 다시 회문산(830m)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읍역 앞, 택시기사 다섯 명이 내 주변에 모여들었다. “회문산이라야!” “흐미, 거기가 어디라고.” ‘내장산요!’라고 외칠 것을 예상했던 기사들은 뒤통수를 맞은 듯 재빨리 대책회의에 들어갔고 어렵사리 출발했다. 정읍에서 회문산까지는 29, 21번 국도를 따라 두 곳의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도로 회전 각도가 미시령 옛길 저리 가라다. 서래봉(624m)·장군봉(606m)·백방산(668m)·세자봉(709m)·용추봉(583m)·여분산…. 스쳐 지나가는 꼭짓점도 여럿이다. 게다가 회문산 남쪽의 구림천과 북쪽의 섬진강은 산 동쪽의 물우리에서 만나 남으로 흐른다. 이웃한 여러 산이 포개진 데다 물줄기는 산을 감싸듯 휘감고 있어 회문산은 천혜의 요새가 되었다. 전북 순창군 구림면에 뿌리내린 회문산은 자신의 한쪽 가지에 사람 들여놓기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흙 파고 바위 뚫어 길 닦기 쉬워진 시대 전이라면 모진 고생 참고 가야 할 일이다.



전북 순창 회문산 장군봉(왼쪽 앞 봉우리) 너머로 지는 해처럼 빨치산도 저물었다. 역사의 한편이 갈무리됐지만 종언이 아니다. 찬찬히 곱씹어보고 되새겨볼 일이다.
#갈림길에서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전북도당 유격대의 각 부대는 병단 체제로 구성돼 회문산 주변의 산에 배치됐다. 남쪽의 성미산(589m)에는 벼락병단이, 동쪽 여분산에는 번개병단과 카투사병단이, 북쪽 히여터에는 탱크병단과 야전병원이, 서북쪽에는 독수리병단과 임실군당 유격대가 있었다. 회문산 장군봉(780m) 밑 대수말에 자리 잡은 도당 사령부는 그 직속으로 보위병단을 거느려, 방어선을 겹겹으로 만들었다. 충남도당은 대둔산으로 거점을 옮겼다. 충남북 도당은 거점으로 삼을 만한 산이 적어 힘이 약했다. 경남도당은 지리산 하봉에 자리를 잡았다. 경북도당은 태백산을 근거지로 삼았다. 전남도당은 백아산에 둥지를 틀었다. 51년 2월, 이현상이 이끄는 남조선 인민 유격대(남부군)가 백두대간을 이용해 덕유산까지 내려왔다. 이현상은 보성전문학교에 다니던 일제시대부터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 경찰의 검거를 피해 지리산에 입산한 경험이 있다. 남로당 당수인 박헌영과 월북한 뒤, 전쟁 전에 다시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생활을 했다. 3월, 군경 1만의 병력은 회문산을 포위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사람을 회문산은 평온과 평탄으로 맞이해줬다. 휴양림 숙소 바로 뒤 삼연봉으로 발길을 옮겼다. 언제나 그렇듯 바로 능선까지 치고 올라가는 일은 고되다. 코가 바닥에 닿을 정도지만 여기서는 잠깐이다. 회문산 주 능선에 오르기만 하면 햇볕 볼 일 거의 없다. 웃자란 철쭉과 물푸레·상수리·산벚·노린재나무가 숲 터널을 만들어 준다. 사람 한 명 만나지 못해 마음은 불안하지만 몸은 편안한 길이 이어진다. 회문산이 준 평온은 적막함, 평탄은 밋밋함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천마봉(775m)을 뒤에 두고 걸음을 재촉하다 회문산 정상과 장군봉으로 갈라지는 지점에서 때아닌 뜸을 들였다. 장군봉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오른쪽으로 갈지, 왼쪽으로 갈지….



#회문산 장군봉에는 지금 바람만이 …



2 회문산 능선의 서어나무 갈림길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 오른편에 있는, 은신처로 사용됐음직한 굴. 길을 벗어나야 볼 수 있다. 3 천근월굴(天根月窟)이 새겨진 바위.천근은 ‘양(陽)’이고 월굴은 ‘음(陰)’이니 음양의 조화로 육체가 완전하게 된다는 뜻이다. 중국 송나라 시인 소강자의 유가시에서 따와 1900년에 동초 김석곤이 새겼다한다. 4 자연휴양림 안 ‘빨치산사령부’ 앞에 있는 부조. 전쟁과 갈등의 와중에 희생된 민간인을 추모하는 내용이다.
‘회문산 정상이 함락되었다… 장군봉이 떨어지면 회문산의 모든 능선을 빼앗기는 것이다’(『남부군』 중에서). 모든 병단이 가세한 빨치산과 물밀 듯 올라오는 군경은 낮밤 없이 밀고 당기기를 반복했다. 회문산의 마지막 보루인 장군봉은 결국 군경의 손에 넘어갔다. 도당 사령부는 회문산을 뒤로 한 채 동쪽 금남호남정맥상의 성수산(1059m)·팔공산(1151m)을 거쳐 백두대간상의 백운산(1279m), 장수 덕유산(1492m)을 맴돌다 지리산에 들기도 했다. 지리산에서는 남원 쪽의 뱀사골·반야봉을 비트로 삼았다. 회문산에서 변산 쪽으로 이동한 빨치산은 곧 궤멸됐다. 5월, 이현상은 덕유산 송치골에서 6개 도당위원장 회의를 주재하고 빨치산의 총사령관이 됐다. 노동당은 94호 결정서를 통해 각 도당을 지구당으로 개편시키도록 했다.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는 반발했다.



갈림길에서 장군봉을 찍고 다시 갈림길까지 되돌아와야 하는 부담에도 가야 했다. 장군봉을 빼면 회문산은 밋밋해진다. 길 맛도, 눈 맛도 싱거워진다. 이야기 맛도 맹탕이 된다. 조릿대를 헤치고 칼풀에 베이며 장군봉에 올랐다. 회문산과 손잡고 있지만 장군봉은 전혀 다르다. 육산이면서 거대한 바위를 품고 있다. 그래서 투구바위라고도 한다. 이 봉우리는 이웃한 봉우리와 이어지기 위해 한껏 똬리를 틀었다. 바위에 올라섰다. 60여 년 전 어느 날, 총성이 울리고 불길이 치솟았으며 비명이 메아리친 곳. 지금은 고요하기만 하다. 바람만이 촘촘하게 자란 나뭇잎을 비벼대고 있었다.



#엄청난 민간인 희생자



5 6·25 양민 희생자 위령탑. 6 빨치산사령부 출구쪽의 빨치산 모형. 입구 쪽에도 총을 든 빨치산 모형이 있다.
51년 11월, 백선엽 제1군단장은 전주에 빨치산토벌사령부를 세운다. 이른바 백 전투사령부. 지리산을 비롯해 덕유산·백운산·백아산·모후산·조계산·태백산·신불산 등 영·호남에 밀집한 빨치산 근거지를 압박했다. 5만 명이 넘는 병력이었다. 빨치산은 이를 ‘1차 대침공’이라고 불렀다. 빨치산의 최대 거점인 지리산이 주 타깃이었다. 이 작전은 이듬해 3월까지 이어졌다. 빨치산은 조직을 추슬렀지만 군경의 토벌작전은 수시로 이어졌다. 지구에서 지구로 이어지는 연락 루트가 대부분 노출된 빨치산은 힘을 급격히 잃어가고 있었다. 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박헌영·이승엽 등 남로당계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숙청된다. 박병권 5사단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박 전투사령부가 남원에 차려졌다. 이른바 ‘2차 대침공’.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내분에 의해 직위해제당한 채 9월 지리산 빗점골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경남 유격대를 이끈 이영회가 11월에 군경과 교전 중 사망한다. 54년 1월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는 비트가 발각되자 자폭한다. 2월, 전남도당 위원장을 지낸 박영발이 지리산 반야봉의 한 동굴에서 같은 빨치산이 쏜 총에 의해 사망한다. 4월엔 전남 유격대 총사령관 김선우도 백운산에서 군경에 의해 사살된다. 빨치산은 스러졌다.



한국전쟁 중 사망한 남쪽 사람들은 99만 명이다. 이 중 37만여 명이 민간인이었다(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기념사업회). 군경과 인민군에 의해 처형된 좌·우익 인사, 부역자 등을 합하고 곳곳에서 갈등관계에 있던 집단 간의 충돌로 인해 희생된 자들을 합하면 ‘민간인 희생 37만 명’을 훨씬 넘을 것이라고 한다. 이념에 따라서였을까 궁핍이 불러서였을까. 갈등 때문에 그랬을까, 전략에 의해서였을까. 빨치산은 선택의 갈림길에 섰고 한쪽을 택했다. 장군봉에서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온 뒤, 회문산 정상을 지나 헬기장에 이르렀다. 장군봉 너머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어제의 지금처럼…. 그렇게 수많은 되풀이를 통해 역사가 만들어졌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한반도 남쪽 거의 모든 산에 들었던 빨치산. 그들은 사라졌지만 역사는 남는다. ‘그들의 산’도 남는다. 또 다른 선택은 지금 우리의 몫이다. 어스름이 빛과 물체의 구분을 허무는 순간, 난 가야 할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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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글·사진=김홍준 기자






●산행정보 회문산은 자루에 깊게 들어가 있는 낟알처럼 외진 곳에 있다. 전북 임실군 덕치면과 순창군 구림면에 걸쳐 있다. 회문산자연휴양림(063-653-4779)에 가려면 정읍이나 광주까지 KTX를 타고 순창까지 시외버스를 이용한 뒤, 오전에 두 번, 오후에 두 번 출발하는 버스로 갈아타고 안정리 안시내에서 내린다.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임실터미널까지 고속버스를 이용한 뒤 하루 5~6회 운행하는 시외버스로 도착할 수도 있다. 회문산은 1846년 천주교 병오박해 때 김대건 신부 일가가 피신했던 곳이며, 구한말 최익현 선생과 임병찬·양윤숙 의병대장이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장소였다. 명당으로 알려져 묘가 많다. 강천산 군립공원, 순창고추장마을이 지척이다. 안정리에 위치한 만일사에 순창고추장시원지가 있으며 이웃한 쌍치면의 복분자가 유명하다. 회문산 서쪽으로 영취산·장군봉, 동쪽으로는 원통산과 지리산 줄기, 남쪽으로는 추월산·무등산, 북쪽으로는 백련산·모악산이 보인다.






뒤적뒤적 산행수첩 │ 등산에티켓 ③



더위 식히려 ‘풍덩’ 했다간 과태료 20만원 ‘앗 뜨거라’




2010년 7월 3일 북한산 삼천사 입구~응봉 능선~비봉 탐방지원소, 비 온 뒤 흐림, 영상 28~29도.



‘계곡물이 힘차게 넘쳤다. 한국어, 영어를 뒤섞어 쓰는 ‘다국적팀’. 그들은 돌연 웃통을 벗고 계곡에 들어갔다.’



아침에 비가 왔다. 억수로 왔다. 아내의 이마에 ‘악천후로 인해 무리한 야외활동은 자제해 주세요’라는 디지털 문구가 우에서 좌로 흘러 지나는 것 같았다. 비가 잦아들었다. 결국, 그쳤다. 아내의 이마에는 장마전선이 드리워졌다. 나는 그 ‘장마전선’을 피해 집에서 냉큼 사라졌다.



비 온 뒤의 산행은 어렵다. 흙은 질척하고 바위는 미끄럽다. 토사 붕괴 위험도 있다. 발 디딤에 더 신경 쓰고 위험구간은 피하면 된다고 치자. 피할 수 없는 건, 한껏 머금은 습기를 고스란히 내뱉는 길이다. 숨이 막힐 정도다. 밭은 숨을 내몰고 산행 막바지에 이르면 모든 역경을 충분히 만회하고도 남는 것이 있다. 큰 소리 지르며 넘쳐흐르는 물이다. 비 온 뒤 하산길에 만나는 계곡물은 세상의 모든 청량음료를 준다고 해도 바꾸기 싫다.



“으허~ 으허~ 시원하다.”



“호호호~.”



계곡의 커다란 바위 뒤에서 남자가 웃통을 벗고 물을 온몸에 뿌리고 있다. 비누까지 칠하며, 춤추듯 성심성의껏 제 몸을 문지르고 있다. 앞의 여자는 박자에 맞춰 춤추라는 듯, 간혹 박수를 치며 웃고 있다. 그럴수록 남자는 힘을 내며 몸을 ‘박박’ 문지른다. 계곡 따라 조금 더 내려갔다.



일단의 무리가 발을 물에 담근 채 ‘작업’ 중이다. 집게손가락으로 신체 중 가장 땀이 많이 난다는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를 문지르고 있다. 공들여 작품을 빚는 장인의 손놀림 같다. 조금 더 내려갔다.



“자, 이게 자연의 맛이란다. 비 많이 왔으니 깨끗해. 물맛이 달 거야.”



아빠는 어린 아들에게 계곡물을 한잔 떠 건네줬다.



“아빠! 완전 달아!”







‘그래. 모르는 게 약이다.’



자연공원법 29조와 그 시행령 26조에 따르면, 계곡에서 목욕과 세탁은 금지행위다. 적발 시 과태료 20만원을 내야 한다. 또 자연공원법 28조는 생태계 보존과 회복을 위해 출입금지 지역을 설정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이를 위반한 사람에게 같은 법 86조를 적용, 5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릴 수 있도록 했다.



글=김홍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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