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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36) 피로 물든 여수

물과 자연의 경색(景色)이 빼어나 그런 이름이 붙었을 여수(麗水)지만, 1948년 10월 20일 아침의 그곳은 이미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경찰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우익으로 분류된 사람들과 그 친지들이 집중적으로 피해를 봤다.



인민재판이 여수를 휩쓸었다
반란군은 800명 학살하며 북상
놀란 순천 경찰은 수감 좌익 처형
피가 피를 부르는 악순환이…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그런 잔혹성이 뿜어져 나왔는지는 지금 생각해 봐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로부터 2년 뒤 이 땅 위에서 벌어졌던 동족상잔의 6·25전쟁 통에 나타났던 그 처절한 피의 학살과 보복의 원형(原型)은 이미 그때의 14연대 반란 사건 현장인 여수와 순천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14연대가 일으킨 반란은 출범 초기의 대한민국을 혼란으로 몰고 갔다. 여수에 투입된 진압군이 민가 쪽에서 치솟는 커다란 불길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종군작가 칼 마이던스(1907~2004)의 사진으로 촬영 시기는 그해 11월로 돼 있다. 당시 라이프지에 게재된 사진이다.
경찰의 저지선은 앞서 말한 대로 20일 새벽 2시쯤에 맥없이 무너졌다. 시내 곳곳에서는 강렬한 적개심을 안은 14연대 반란군들이 잔혹한 공격을 하고 다녔다. 영문도 모르는 채 느닷없이 총성과 학살의 한복판에 빠져든 여수 시민들은 그저 불안에 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수 현지에서 활동을 벌였던 좌익들은 반란군 대열에 함께 뛰어들어가 경찰을 학살하고 여수 읍내의 모든 공공기관을 점령했다. 자정 무렵부터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여수는 인공기가 높이 오른 인민공화국의 천하(天下)로 바뀌었던 것이다.



나중에 조사된 기록에 따르면 여수 읍내 거리에는 20일 개최한다는 ‘인민대회’ 포스터가 나붙었고 ‘제주도 출동 거부 병사위원회’ 명의로 ‘제주도 출동 결사 반대, 미군의 즉각적이면서 완전한 철수, 인민공화국 수립 만세’를 요지로 하는 성명서가 발표됐다.



또 남로당의 여수 지방 조직인 읍당에서는 재빨리 읍의 인민위원회를 조직한 뒤 여수 내의 경찰과 그 가족, 우익 인사들과 그 친지들을 색출하는 데 착수했다. 여수에서는 21일까지 약 800명의 이른바 ‘반동’으로 분류된 경찰과 그 가족, 그리고 우익 인사들이 붙잡혀 여수 경찰서 뒷마당과 중앙동 로터리에서 처형됐다. 특히 경찰이나 우익 청년단체 단원들에 대한 그들의 적개심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참혹함으로 나타났다.



14연대 반란 사건이 수습된 뒤 『광복 30년 Ⅱ-여순반란편』의 공저자로 당시의 반란 사건 진상 규명에 주력했던 김석학 무등일보(無等日報) 논설위원의 조사 내용은 자세히 읽어볼 만하다. 그에 따르면 당시 여수에서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인민재판’이 열려 해당자들이 즉석에서 처형됐다는 것이다. 죽창이나 총검으로 찌르거나 몽둥이로 때려 죽이는 예가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일부 여순경은 신체 일부를 심각하게 절단당하거나 훼손당한 채 죽어갔다. 그 모습이 너무나 참혹해 수습을 위해 현장에 들어선 사람들이 한동안 넋을 잃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항구 도시인 여수의 거리 곳곳에는 이미 원통한 죽음이 가득 넘쳐났다.



반란군은 여수를 점거한 뒤 바로 순천으로 북상했다. 여수는 한반도 서남부에 툭 튀어나온 반도형의 지역이다. 북쪽에서 이곳으로 통하려면 순천을 거쳐야 했다. 반란군은 곧 열차 편으로 순천을 향했다.



여수에서 피바람을 몰고 왔던 반란군의 소식을 들으면서 순천의 경찰들은 어떤 준비를 했을까. 그것은 화근(禍根)을 없애기 위한 선제(先制) 보복이었다. 순천의 경찰들은 반란군이 진입하기 전에 수감 중이던 좌익 혐의자들을 미리 집단 살해했다. 자신의 동료와 친지들이 죽어 넘어진 상태에서 행해진 경찰의 보복이었으니 그 참혹함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순천의 경찰이 후퇴한 뒤 들이닥친 반란군 또한 경찰과 그 가족을 색출해 잔혹하게 살해하는 피의 악순환을 벌였다는 것이다. 순천에 진입한 반란군과 좌익 인사들은 한층 조직적으로 우익 인사 색출 작업에 나섰다. 특기할 만한 것은 14연대가 휩쓸고 지나간 여수와 순천의 반란 사건에서 6·25 때 북한군이 침략해와 대한민국 곳곳을 점령하고 벌였던 인민재판이 벌써 그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몇 가지 죄상을 나열해 흥분한 대중에게 호응을 이끌어 낸 뒤 사람을 잔혹하게 학살하는 그 방식 말이다.



그것은 사람이 지닌 인성(人性)이라기보다 동물이 지닌 수성(獸性)의 거센 폭발이었다. 야수(野獸)가 그 자신이 지닌 잔혹한 맹성(猛性)을 여지없이 드러내 하루 전까지 서로 말을 주고받던 사람을 그대로 죽여서 땅에 묻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슬프게도, 14연대 반란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모습을 완연히 드러냈다. 그리고 2년 뒤 벌어져 한반도에서 3년 넘게 진행된 전쟁의 앞뒤에서 줄곧 벌어졌다. 나는 그 참상을 멀리서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좌와 우로 편이 나뉘어 싸움을 벌이게 되는 그런 현상의 연원이나 따지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막 출범한 대한민국의 근기(根基)를 뒤흔드는 일이었고, 그것을 잠재우지 못하는 한 우리는 또 다른 혼란의 극심한 고통으로 내몰려야 했다.



더구나 군의 내부에서 그런 반란이 촉발된 것이다. 군 내부에 어떤 적이 숨어들어 있는가를 따지기 전에 우리는 그들을 먼저 진압해야 했다. 우리는 군을 움직이는 방법을 따지기 시작했다. 통신 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상황이라서 철도 경찰대의 경비 전화망을 타고 반란의 급보가 서울에 전해지고 있었다.



20일 오전 9시 서울의 국방부에서 긴급 대책회의가 열렸다. 이범석 국방장관은 지금의 서울 퍼시픽호텔 자리에 있던 국방부의 사무실로 채병덕 국방부 참모총장, 정일권 육군참모부장(현 육군참모차장)과 나를 불러 들였다. 미 임시군사고문단(PMAG) 단장 윌리엄 로버트 준장과 육군참모총장 고문관 짐 하우스먼 대위, 정보국에 나와 함께 있던 고문관 존 리드 대위도 함께 모였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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