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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34) 반란의 밤

바다 건너 제주도에서 오른 횃불이 전남 여수에서 다시 올랐다. 빨치산이라고 하는, 그때까지는 다소 낯설었던 단어가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정식 국군으로 편제를 마친 우리 군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였다. 바로 ‘여수와 순천(여순) 반란’ 사건이다. 이 사건은 10여 일 동안 벌어지면서 끝을 맺지만 반란을 일으킨 세력의 일부가 지리산으로 숨어들면서 대한민국 군대와 장기간에 걸쳐 싸움을 벌이게 된다.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비정규군(非正規軍)의 고립적인 병력이 한 거점을 차지하고서 싸움을 벌이면 그게 바로 빨치산이다. 지리산으로 숨어든 반란 주동 세력의 일부는 그렇게 빨치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제주도 4·3 사건’이 아직 채 끝을 맺기도 전에 그 14연대의 반란 사건이 우리 앞으로 닥쳤다.



주민은 무관했다 … 그래서 ‘여순 반란’ 아닌 ‘14연대 반란’이다

공식적으로 부르는 이 사건의 이름이 ‘여순 반란 사건’이지만, 실제 여수와 순천의 당시 주민들은 이 반란 사건과 관련이 전혀 없다. 14연대 병력의 일부가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하고 벌였던 사건이라서 앞으로는 ‘14연대 반란 사건’이라고 적겠다.



1948년 10월, 여수 14연대가 아군을 향해 총부리를 돌렸다. 창군 초기 국군에 침투한 남로당 하급 조직원들이 일으킨 ‘여순반란 사건’이다. 사진은 여수에 투입된 진압군이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모습. 종군작가 칼 마이던스(1907~2004)가 찍어 당시 미국 라이프지에 게재됐다. 똑같은 군복을 입은 반란군과 구별하기 위해 진압군은 철모에 흰색띠를 둘렀다.
이 사건은 제주도 폭동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제주도의 좌익 반란을 막기 위해 증파하려 했던 부대가 총을 거꾸로 돌리면서 반란을 도모한 것이다. 여수 14연대의 제1대대는 1948년 10월 19일 오후 10시 무렵 LST(상륙용 주정) 편으로 제주를 향해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부대 이동에 관한 기밀이 누설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14연대장 박승훈 중령은 출발 시간을 두 시간 늦추도록 했다. 서울의 육군 총사령부에서 하달한 명령이 여수 우체국을 통해 일반 전보로 내려오는 바람에 기밀이 샐 가능성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때는 제주도 근해에 소련 잠수함이 출몰한다는 소문도 자주 나돌았다. 부대가 LST 편으로 이동하는 사실과 그 시간이 알려진다면 소련 잠수함의 공격을 받을지 모른다는 점을 걱정했던 것이다. 그때는 그렇게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그림자가 남한에 어른거릴 시기였다.



나는 14연대가 출발 시간을 늦췄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반란 사건이 터진 뒤였다. 그러나 나는 그전에 14연대가 병력 출동 전에 여러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알았다. 출발 당일에 그런 문제점이 벌써 드러났다.



오전 10시에 시작한 파견 1대대의 군장 검사가 오후 6시가 다 돼서야 끝났고 그 뒤를 이어 시작한 야전 침대와 매트리스 등 개인 물자 선적도 하염없이 늦춰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등(消燈) 나팔 소리가 울린 오후 10시에 겨우 1중대가 선적을 끝낸 상황이었으니 이들이 순조롭게 출발한다는 것은 아예 기대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14연대 병영은 일제 시대 일본 해군이 만든 비행장 자리에 있었다. 바닥이 모두 포장된 곳이라 출동 부대 대원들은 모두 바다에 닿은 대대 막사 옆의 콘크리트 바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연대장은 읍내에 나가 있었고, 부연대장도 그랬다. 장교 식당에서 열린 환송회에 참석했던 장교들은 대부분 회식을 마친 뒤 영내·외의 숙소에 돌아가 잠이 든 상태였다. 그때 사건이 터졌다.



갑자기 비상 나팔 소리가 밤하늘을 갈랐다. 그러고는 정확하게 몇 발인지 모를 총소리가 뒤를 이었다. 당시 14연대 병영 근처에는 밤에 배를 타고 몰래 들어와 장작을 훔쳐가는 민간인이 적지 않았다. 부대 앞 어로 금지 구역에 몰래 숨어들어와 고기잡이를 하는 어선도 있었다. 이들에게는 위협 사격을 가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장교와 사병들은 따라서 ‘오늘 밤에도 민간인이 들어와 장작을 훔치는구나’라는 생각으로 총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비상 나팔 소리는 달랐다. 훈련을 받을 때 비상 나팔 소리를 들으면 무조건 연병장으로 집합하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부대는 이날 자정에 출동하기로 돼 있었다. 따라서 비상 나팔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지금은 훈련이 벌어지는 때가 아닌데…’라는 생각에 연병장으로 즉각 뛰쳐나간 장병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부대 곳곳에서는 벌써 피 냄새가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당시 1대대 작전 교육관으로 있던 전용인 소위는 현장에서 그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그의 기억은 이렇다.



“당시 1중대장실에서 자고 있다가 밖으로 나가 연병장으로 향하는데…근무중대 옆 사무실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총소리가 나면서 여러 명이 언덕길을 달려 내려왔다…대대 부관 김정덕 소위가 양팔이 늘어져 덜렁거리는 상태로 달려 내려와 ‘저 놈들이 나를 쐈다’고 소리치며 내 앞에 털썩 쓰러졌다….”



그의 기억은 생생하다. 처음에 14연대 병영에서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를 아주 자세하게 그려주고 있다. 폭도들은 바로 탄약고로 달려갔다고 했다. 이어 자물쇠에 총을 쏴대고 있었고, 비상 나팔 소리에 잠을 깬 병사들은 뒤늦게 연병장으로 몰려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전화선을 통해 연대장에게 보고를 하려고 했지만 전화선은 이미 모두 끊긴 상태였다. 무전기를 사용하기 위해 연대 통신소로 가려던 그는 그때 반란 사건의 주동자인 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가 연병장에서 사병들을 모아놓고 선동(煽動)하는 연설을 들었다고 했다.



지창수는 “경찰이 우리를 습격해 들어온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최대한 실탄을 나눠 갖고 응전 태세를 갖추자. 동족을 살상하기 위한 제주도 파병에는 절대 반대한다…지금 북조선 인민군이 38선을 돌파하고 서울을 향해 내려오고 있다. 우리는 지금부터 인민해방군이 된다. 조국통일을 위해 미국의 괴뢰들을 쳐부수자. 제국주의의 앞잡이인 장교들도 모두 죽이자”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저기서 “옳소, 옳소!”라는 병사들의 외침도 들렸다고 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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