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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악역

조커가 없는 배트맨은 어떨까. 그저 조무래기나 상대하는 ‘용감한 시민’ 신세 아닐까. 한데 지략과 책략이 뛰어난 ‘악당본색(惡黨本色)’ 덕분(?)에 배트맨도 ‘수퍼 히어로’의 면모를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영화에서는 아카데미상에 빛나는 잭 니컬슨, 지난해 타계한 청춘의 우상 히스 레저가 연기한 ‘악역(惡役)’ 조커의 존재감이 오히려 주인공을 압도할 정도였다. 이처럼 극에서의 ‘악역’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캐릭터다. ‘수퍼맨’의 렉스 루터, ‘스파이더맨’의 고블린과 닥터 옥토퍼스가 그렇다. 007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역시 제1탄 ‘살인번호’의 닥터 노, 최근작 ‘카지노 로얄’의 르 쉬프르가 없다면 단지 매력적인 플레이보이에 불과했을 것이다.

악역이 없으면 맥 빠지는 게 서부극이다. 리 밴 클리프는 무법자 역(役)으로 독보적이다. 데뷔작 ‘하이 눈’에서 그의 불량함은 째깍째깍 시계 소리와 더불어 극적 긴장도를 한껏 높인다. 결국 ‘각본대로’ 주인공 게리 쿠퍼의 총에 쓰러지면서 영웅 탄생을 돕지만. ‘석양의 무법자’에서는 ‘나쁜 놈(The Bad)’으로 출연, ‘좋은 놈(The Good)’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희생양이 된다. 김지운 감독의 ‘놈놈놈’은 이 영화를 패러디했는데, ‘나쁜 놈’ 이병헌은 너무 멋있어 주인공이 빛을 잃었다.

때론 악역이 더 주목을 받는다. 역사 드라마 선덕여왕의 ‘미실’이 대표적이다. 제목이 선덕여왕인데도 시청자들은 무한권력의 ‘미실’에 반했다. 나중엔 브레이크 걸린 권력의 눈물까지 가슴 아파했다. 실제 역사에서는 어떤가. 권력투쟁의 승자는 악역이라도 결과적 지선(至善)인가. 소설 삼국지에서 악역은 단연 조조다. 때론 그의 야박함이 유비의 후덕함을, 얕은 권모술수가 제갈공명의 신출귀몰(神出鬼沒)한 용병술을 돋보이게 한다. 하지만 결국 조조의 위(魏)는 유비의 촉(蜀)을 멸하고 후한(後漢)에 이어 정사(正史)의 주인공이 된다. 역사에서 악역은 대부분 시대의 변곡점에 서 있다.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세운 태조, ‘단종애사(端宗哀史)’의 세조가 그렇다.

최근 청와대 한 수석비서관이 “신성일·김진규 역할을 하고 싶었는데, 허장강·박노식도 필요하다”고 소회를 피력했다. 그렇다면 주인공을 빛내고 스러지는 ‘악역’이었다는 뜻인가. 시대적 구설(口舌)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역사의 ‘악역’을 뜻한 것은 아닌가. 후자라면 그 역이 태조의 정도전일지, 세조의 한명회일지 궁금하다.

박종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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