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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NO’라고 말할 수 있는 한국

원숭이 무리의 왕초 자리는 불안하다. 힘 좀 쓴다는 수컷들이 호시탐탐 권좌를 노린다. 왕초의 힘이 약해지면 이놈 저놈 집적대게 마련이다. 몇 번은 도전을 물리치지만, 언젠가는 마지막 도전자에게 권좌를 넘겨주게 된다. 권좌를 빼앗는 마지막 놈 A는 대개 왕초가 가장 힘겹게 물리친 도전자 B의 바로 다음 타자이기 쉽다. A는 B의 실패를 통해 왕초의 힘을 한계까지 정확히 확인하고 뭐가 부족한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원숭이 세계의 철칙이 사람 세계라고 안 통한다는 법이 없다.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이 쥐고 있는 세계 경제 패권에 빗대보자.

원숭이로 치면 지금까진 도전자 B쯤 되는 게 일본이다. 20여 년 전 일본은 미국에 처음 ‘NO’라고 말했다. 1980년대 후반의 일본은 거품경제의 최절정이었다. 엔고와 증시 거품 덕에 세계 10대 은행(시가총액 기준)을 잠시 싹쓸이하기도 했다. 제조업 신화도 새로 썼다. ‘미국이 미사일을 쏘려 해도 일본의 반도체 없인 안 된다’며 큰소리쳤다. 열도 전체에 미국을 물리치고 수퍼 파워 국가가 된다는 환상이 퍼졌다.

이런 환상은 1989년 나온 책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에서 절정을 맞았다. 소니의 창업주 모리타 아키오와 현 도쿄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가 공동 집필해 공전의 히트를 했다. 1년 만에 20쇄를 찍었다. 한국·중국에서도 불티나게 팔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90년이 되자 거품이 꺼지기 시작했다. 도쿄 증시는 3분의 1 토막이 났다. 금융사가 도산하고 제조업도 휘청댔다. 반면 미국 금융회사들은 도쿄 증시 하락에 베팅해 거액을 챙겨갔다. 기카와 모토타다는 『머니패전』에서 “재산 손실 비율로 볼 때 1990년 금융 참패의 결과는 제2차 세계대전 참패의 결과와 맞먹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원천기술이 부족한 제조업, 첨단 소프트웨어 없이 덩치만 부풀린 금융을 과신한 대가였다.

두 번째 ‘NO’ 역시 동아시아에서 나왔다. 원숭이로 치면 마지막 도전자 A일지 모를 중국이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은 1996년 출간됐다. 그러나 이 책의 ‘NO’는 실력 대신 감정에 치우쳤다. 당시 중국 경제는 미국에 견줄 바 아니었다. 체제 불안으로 곧 침몰할 것이란 관측이 더 많았다.

실력을 겸비한 중국의 ‘NO’가 본격화한 건 지난해부터. 금융위기로 미국 경제가 크게 흔들린 반면 중국 경제는 끄떡도 않으면서다. 세계 최강 제조업에 걸맞게 금융 쪽도 충분히 덩치를 키웠다. 세계 10대 은행 중 5개를 차지했다. 미국의 위안화 절상 요구에 단호하게 ‘NO’를 외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를 그대로 담은 책『중국은 불쾌하다』는 지난해 베스트셀러가 됐다. 책은 ‘미국의 목표가 중국에서 이득을 취하려는 것은 불쾌한 일’이라고 못 박았다. 여기까지는 일본과 같다. 앞으로는 어떨까. 제일재경일보의 부편집장 장팅빈은 “중국은 일본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일본이 왜 실패했는지 잘 아는 만큼 전철을 따라가지 않을 거란 얘기다.

그의 말마따나 최근 중국은 일본과 다른 행보를 했다. 수비형 ‘NO’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공격형 ‘NO’를 한 것이다. 주인공은 신용평가회사 다궁(大公)이다. 이 회사는 미국의 신용등급을 중국 밑에 갖다 놨다. 엊그제 세계 50개국의 신용등급을 발표한 자리에서다. 중국이 10위, 미국은 13위였다. 관젠중(關建中) 대표는 “비서방 국가 중 처음 (다른 나라) 신용등급을 매겼다”며 “미국 신용평가회사들의 독점과 잘못된 잣대를 바로잡겠다”고 말했다.

다궁의 전문인력 250여 명 중엔 국책 연구원이 다수 포함돼 있다. 반관(半官) 조직인 셈이다. 중국 정부가 다궁을 내세워 미국의 금융 패권에 정식으로 도전장을 던졌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G2 대전’의 승부는 쉽지 않을 것이다. 볼 만한 구경거리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왠지 씁쓸하다. 동아시아 3국 중 우리만 남았다. 몇 십 년째 남의 잔치만 구경해서 되겠는가. 『NO라고 말할 수 있는 대한민국』을 갈망한다.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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