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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제2부 薔薇戰爭제4장 捲土重來:30년에 걸친 장미 전쟁 끝나

왕위에 즉위한 신무왕은 즉시 자신의 할아버지인 예영을 추존하여 혜강대왕(惠康大王)이라고 하고,아버지 균정을 성덕(成德)대왕, 어머니 박씨를 헌목(憲穆)태후라 하였고, 아들 경응을 내세워 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즉시 신무왕은 자신의 원수를 갚는 데 일등공신이었던 장보고를 경주로 맞아들였다. 장보고가 아니었다면 온전히 목숨을 부지할 수조차 없었으며, 장보고가 아니었더라면 임금과 아비의 원수를 갚고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음을 잘 알고 있었던 김우징, 신무왕은 장보고가 입궐하자 친히 어좌에서 내려와 장보고를 맞아들이며 말하였다.



"어서 오시오, 장대사."



김우징은 장보고의 손을 맞잡으며 말하였다.



"이 몸이 주검에서 일어나 기사회생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장대사가 베풀어준 큰 은덕 때문이었소이다."



『삼국사기』는 이때 신무왕은 장보고에게 다음과 같은 벼슬을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해진대사 궁복을 봉하여 감의군사(感義軍使)를 삼는 동시에 그에게 식읍(食邑) 2천호를 봉하여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기의 기록과는 달리 당나라의 시인 두목은 『번천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정년이 국도에 이르러 반역자를 죽이고, 임금을 세워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장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정년으로 하여금 장보고를 대신하여 청해진을 지키게 하였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두목의 기록에 대해서 '신라의 전기(傳記)와는 퍽 다르나 두목의 전기이므로 그대로 내버려 둔다'하고 평하였던 것을 보면 김부식의 기록이 보다 더 정확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809년 동생인 제옹과 더불어 김언승이 선왕이었던 애장왕(哀莊王)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이래로 연달아 세 명의 군왕이 시해당하고 신하가 왕위에 오르는 30년에 걸친 장미전쟁은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이다.



장미전쟁.



권력을 쟁탈하기 위해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형제가 골육을 상잔하는 이 비극적인 피의 전쟁은 일찍이 우리나라 역사상 볼 수 없었던 유일무이의 대참사였던 것이다. 이 참사에 대해 김부식은 사관으로서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사신이 논하여 가로되 구양자(歐陽子)의 사론에 '노의 환공(桓公)은 은공(隱公)을 죽이고 자립한 자이며, 선공(宣公)은 자적(子赤)을 죽이고 자립한 자이며, 정의 여공은 세자 홀(忽)을 쫓고 자립한 자이며, 위왕 공손표(公孫剽)는 임금 연(衍)을 쫓아 자립한 자이거니와 성인이 춘추에 그들의 임금 노릇한 것은 빼놓지 않고 기록하라고 한 것은 각각 그 실상을 전하여 후세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 것이다. 위의 네 임금의 죄는 귀를 가릴 수 없는 사실인즉 사람의 악한 짓이 이제는 거의 그칠 만도 하다."



김부식은 공자가 노나라의 역사에 관한 책인 『춘추』에 임금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일을 기록한 것은 후세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함이라는 구양자의 사론을 인용하고 나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신라의 김언승(憲德王)이 애장왕을 시해하고 즉위하고, 김명은 희강왕을 시해하고 즉위하고, 김우징은 민애왕을 시해하고 즉위하였으니, 지금 이 사실을 적어두는 것도 또한 춘추의 뜻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을까.



춘추의 뜻에 따라 신하가 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비극적인 사실을 기록한 김부식의 직필은 그것으로 끝이 나 버렸음일까.



또 다른 피의 전쟁이 아직 남아있었으니, 그것은 왕위에 오른 신무왕이 즉위한 지 겨우 석달 만인 7월 23일에 숨을 거둬버린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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