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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29) 정보업무의 기초를 쌓다

나는 ‘재미’가 없는 스타일이다. 노는 것을 즐길 줄 몰랐고, 뚜렷한 취미 생활도 없다. 담배는 젊은 시절 한때 애연가라고 불릴 만큼 즐겼지만, 어느 한 순간 끊기로 한 뒤 피우지를 않았다. 술은 더욱 내 곁에 두지를 않았다. 남과 대화하는 것을 꺼리지는 않지만 정감을 섞어서 오랫동안 함께 이야기하는 것은 피한다. 그런 성격이다. 무덤덤하다면 그렇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내가 맡은 일은 열심히 하자는 생각이 강했다.

1948년 4월 ‘제주도 4·3 사건’을 직접 겪은 뒤 서울에 올라와 통위부의 정보국장이라는 자리에 오른 뒤에도 내 생활은 그랬다. 뭔가를 찾아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우리 군대의 상황은 어느 것도 뭔가 정해진 게 없었다. 따라서 선임자와 후임자가 서로 인수·인계할 만한 ‘내용’이 없었다.

통위부 정보국도 마찬가지였다. 통위부장은 처음 미군의 프라이스 대령이 맡고 있다가 47년 2월 군정 이양에 따라 프라이스는 통위부 고문으로 직위가 바뀌고 임시정부 참모총장 출신인 유동열 선생이 통위부장의 자리에 올랐다.

해방 직후 남한은 좌·우익 대립으로 몸살을 앓았다. 사진은 1948년 3·1운동 기념식장에서 소요를 일으킨 좌익 인사가 경찰에 연행되는 모습.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모든 것이 초창기(草創期)의 홍역을 앓고 있었다. 정보국에는 미군 소령 한 명이 김종면 소령과 위관 장교 몇 명을 데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국방경비대의 정보처까지 합쳐 조직은 커졌다고 하지만 특별한 업무가 없었다. 누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한다고 지시하는 사항도 적었고, 스스로 알아서 일을 해나가는 데도 걸림돌이 적지 않았다. 당시의 정보 업무는 미군과 경찰이 장악했다. 우리 군에는 아직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하면서 관리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거의 없었다.

뭔가를 하긴 해야 한다는 내 마음속의 강박감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그저 놀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정보국장으로 오기 직전에 있던 부산의 3여단과 그 전의 5연대 생활에서도 나는 빈 시간을 활용하는 방법 찾기에 골몰한 적이 많았다.

나는 그때 영어 공부에 전념했다. 미군과 마주친 상황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영어를 익혀 저들과 소통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빈 시간이 날 때마다 미 군사교범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부산에 함께 있던 미군들과 대화를 열심히 나눴다. 미군이 사용하는 작전 용어 등 군사 지식에 관한 단어들은 모두 외웠다. 그러면서 차츰 미군을 이해했고, 그들이 구사하는 작전의 개념을 익히기 시작했다.

정보국은 그 분야에서 스스로 쌓아 놓은 지식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미군의 경험을 활용하고 익히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런저런 궁리 끝에 당시 서울에 주둔 중이던 미 24군단의 정보참모 화이트 대령을 찾아 갔다. 그는 인상이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화이트 대령에게 “새로 정보국장에 부임한 백선엽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정보국 업무에 관해 좋은 충고를 듣고자 찾아 왔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는 반갑게 나를 맞으면서 “얼마든지 얘기를 해보라”고 했다. 나는 화이트 대령에게 솔직하고 진지하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정보국 업무를 어떻게 꾸려 가야 옳은지 ‘정답’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내 이야기를 곰곰이 듣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서가(書架)로 다가가 책 여러 권을 꺼내 들고 왔다.

그가 내준 책은 미군이 사용하는 정보 업무의 매뉴얼이었다. 그는 이어 “정보국 업무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꼽을 수 있는 게 신문(訊問)”이라며 “정보요원들에게 먼저 남을 신문해 정보를 정확하게 캐내는 일을 교육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화이트 대령은 또 “미군의 교관과 통역관을 보내줄 테니 정보학교를 설립해 먼저 요원부터 양성하는 게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내 사무실로 돌아와 우선 미군의 정보 업무 관련 매뉴얼을 번역하는 데 착수했다. 당시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꼼꼼하게 이 미군 매뉴얼을 번역했다. 요원들에 대한 교육도 병행했다. 우선 통위부 회의실을 이용해 정보국 간부와 예하부대 정보 실무자들을 모아 놓고 신문 방법 등을 교육했다. 미군 매뉴얼을 바탕으로 진행한 교육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세워진 박문사의 모습.
예산이 마련된 다음에는 당시 남산의 박문사(博文寺) 자리에 있던 기존 사찰 시설을 이용해 정보 교육을 이어갔다. 박문사는 일제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리기 위해 지금 신라호텔 면세품 상가 자리에 세웠던 일본 사찰이었다.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자를 기념하기 위해 일본인이 만든 절터에 우리 군사기관을 세우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체계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단 업무가 서서히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일단은 정보 요원을 양성한다는 큰 원칙이 만들어지고, 그들을 교육할 내용 또한 번역되는 미군 정보 매뉴얼이 많아지면서 점차 증가하고 있었다.

나는 그 다음에 내가 늘 대비해야 할 적의 동향, 적정(敵情)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공산주의 체제로 굳어진 북한의 움직임을 우리 군내의 어느 누구보다 먼저 캐내야 하는 게 내 의무였다. 나름대로 정밀한 교육을 통해 양성되고 있던 정보 요원들을 보내 적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알아야 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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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