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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28) 전쟁 전의 좌익들

지리산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었다. 지리산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그 뒤에도 주마등처럼 늘 스치는 그림들이다. 일본이 물러가고 내가 만주에서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온 직후의 일이다.



4·3 직후 정보국장 발령 … 38선 넘은 나, 좌익과 숙명적 대결

나는 1945년 12월 28일 38선을 넘었다. 해방 정국의 기쁨도 잠시, 평양은 소련이 뒤를 받쳐준 김일성에 의해 서서히 공산당의 천하(天下)로 바뀌고 있었다. 나는 서울로 가기로 작정하고 김백일·최남근과 함께 길을 나섰다.



우여곡절 끝에 개성을 거쳐 도착한 곳이 서울역이었다. 그때의 서울은 혼란스럽다는 인상으로 가득했다. 해방 뒤 맞은 자유의 느낌도 그 안에 들어 있었겠지만, 뭔가 정리가 되지 않은 채 여러 가지 요소가 뒤엉켜 있다는 인상이었다.



종로3가 파고다공원에 도착했을 때였다. 이리저리 서울 거리를 걷다가 도착한 그곳에서 나는 내가 서울을 보면서 느낀 혼란스러움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좌와 우의 극심한 대립이었다. 내 앞으로 좌익의 대열이 몰려왔다 지나갔다. 그들의 표정은 살벌했고, 구호도 사람의 마음을 자극하는 것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들의 뒤를 이어 우익의 행렬도 내 앞을 지나갔다. 좌익의 인상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분위기였다. 그들은 거리 곳곳에서 충돌했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서로 지나가다가 행렬이 엇갈리는 지점에서 욕설을 해대고 주먹질에 이어 난투극을 벌였다.



나는 그런 와중에 군문(軍門)을 향했다. 당시 군인 출신들을 모아 국방경비대라는 조직을 출발시키기 위해 만든 곳이 군사영어학교였다. 한반도 남쪽에 진출한 미군의 군정(軍政)이 만든 조직이었다.



나는 그곳을 거쳐 혼란기의 서울에서 군인이 됐다. 그 과정은 나중에 자세히 다룰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런 곡절을 거쳐 부산의 5연대에서 근무했다. 초기 남한의 국방력은 사단을 편성할 만큼의 기본적인 힘을 갖추지 못했다. 전국적으로 연대 9개를 각 도에 하나씩 두는 게 일차적인 목표였다. 나는 그곳 부산에서 2년여 동안 근무했다. 부산에 하역되는 미군 물자를 관리하는 게 주요 임무였고, 때로는 당시에 유행하던 콜레라에 대비하기 위해 민간인 통행을 통제하는 일과 경찰의 보조로서 치안을 유지하는 일도 맡았다.



제주4·3사건이 진행되던 1948년 5월 5일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의 모습이다. 왼쪽 둘째부터 군정장관 윌리엄 딘 소장, 통역관, 유해진 제주지사, 맨스필드 제주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중절모를 쓰고 뒤쪽에 서 있는 사람), 송호성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장,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2003년 제주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위원장 고건 당시 국무총리)가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견한 사진이다. [뉴시스]
48년 4월에 나는 서울의 국방부 전신인 통위부로 발령을 받았다. 서울로 가기 전의 나는 새로 확대 개편한 3여단의 참모장 신분이었다. 부산 5연대와 함께 제주에서 발족한 9연대도 3여단의 관할 지역이었다. 제주도의 9연대를 마지막으로 시찰한 뒤 서울로 부임하려던 생각으로 나는 그해 4월 1일 제주도에 도착했다.



제주도 모슬포에 있던 9연대(연대장 김익렬 소령)를 방문한 뒤 나는 2일 저녁에 제주읍에 왔다. 여관의 방 하나를 잡은 뒤 하루 묵고 비행기 편으로 서울을 향해 떠날 작정이었다.



김익렬(1921~88), 김달삼(1926~50)(왼쪽부터)
공교롭게도 내가 제주읍에서 하루 묵던 날 사건이 터졌다. 여관방에서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던 무렵에 내게 전화가 걸려 왔다. 9연대 연대장 김익렬 소령의 전화였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밤중에 김달삼이 도내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른바 ‘제주 4·3사건’이었다. 나는 당시 김익렬 소령으로부터 전화를 받으면서 불길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내가 서울에 도착하면서 수없이 목격했던 좌우 충돌의 험악한 현상들이 이제 본격적으로 남한 내 좌익의 무장 반란으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제주도 4·3사건은 그 뒤로도 숱한 문제를 남겼다. 뒤에 다시 여순반란 사건으로 이어지는 남한 내 좌익 반란의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나는 그 다음 날 아침에 사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제주 읍내 곳곳은 아직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다른 지역에서도 당시의 사건이 크게 번지고 있다는 징후를 느낄 수는 없었다.



일정 문제도 있어 나는 그날 오전 미군 수송기에 몸을 싣고 서울로 왔다. 그러나 머릿속은 내가 김익렬 소령으로부터 전화를 받을 때 느꼈던 이상한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신변을 정리한 뒤 다시 서울로 올라가 통위부에 출근했다.



서울에 도착한 뒤 바로 보직 명령이 작전국장에서 정보국장으로 바뀌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정보국은 남한 내부의 좌익에 관한 정보와 그들에 대한 처리 문제를 다루는 곳이었다. 나는 숙명적으로 내가 좌익과의 대결 전면에 서게 됐다는 점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지리산은 광대한 면적의 산악지대여서 남한에서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들이 숨어들기 가장 쉬운 곳이다. 지리산은 그 점에서 갈라진 한반도의 비극을 충분히 예감(豫感)하게 하는 곳이었다. 좌익과의 대결 전면에 선 내 발길은 지리산으로 향할 것이다. 제주에서 폭동을 일으킨 김달삼의 뒤를 잇겠다는 좌익 활동가들도 모여들 참이었다.



그곳 지리산에는 50년 6·25전쟁의 피비린내가 풍기기 2년 전에 이미 질기고 모진 전장(戰場)이 들어서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51년 11월 제임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천거에 의해 지리산 토벌에 나서기 전에 이미 이렇게 지리산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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