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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tory] ‘국적은 한국, 소속은 북한’ 정대세, 그리고 그의 어머니

남아공 월드컵이 배출한 또 한 명의 샛별은 ‘눈물의 스타’ 정대세(26)였다. 44년 만에 월드컵 무대에 나온 북한팀의 성적은 3전 전패(12실점 1득점)로 초라했지만 정대세는 군계일학의 기량을 보여 독일 분데스리가(Vfl 보훔)로 스카우트됐다. 그의 국적이 한국이란 사실은 천안함 사태로 유례없이 악화된 남북관계와 절묘하게 오버랩되어 한국인에겐 더욱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남아공에서 평양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온 뒤 이적 준비로 바쁜 그를 6일 가와사키 구단 훈련장에서 만났다. 그가 브라질전에 앞서 흘린 하염없는 눈물의 의미와, 그보다 수만 배는 더 많이 흘렸을 땀방울에 담긴 그의 진심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튿날 보훔 구단 입단의 마지막 절차인 신체검사를 받기 위해 정 선수가 독일로 떠난 뒤, 기자는 나고야로 이동해 그의 고향집을 방문했다. 어머니 이정금(58)씨를 만나 정 선수와 못다 한 얘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다섯 시간에 걸친 대화 끝에 ‘정대세 투혼’의 원천은 바로 어머니란 결론을 내렸다.



“대세가 빨갱이? 그런 것 없어요, 그저 축구 좋아할 뿐 … 일본 귀화 않고 한민족으로 산다면 국적 상관하지 않죠”

가와사키·나고야=예영준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 지칠 줄 모르고 저돌적으로 그라운드를 누비는 강인함을 높이 평가받아 독일 이적으로 이어진 듯하다.



“헝그리 정신이다. 밥을 굶는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축구를 했다는 게 아니다. 넉넉하진 않지만 대세는 어릴 때부터 큰 고생 없이 자랐다. 내가 말하는 건 재일동포들이 일본땅에 발붙이고 사는 한 소수자(마이너리티)일 수밖에 없는데 이를 극복하고 당당하게 살려면 뭘 하든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굳이 말하자면 민족적 헝그리 정신이랄까.”



● 정 선수의 방에 들어와 보니 메달이나 상장이 수없이 많은데 특히 아끼는 게 있나.



“축구로 받은 상보다 고교 졸업 때 받은 12년 개근상이 우리 집 보물이다. 대세는 초등학교부터 지각 한 번 안 했다. 일본에선 개근상 제도가 없어졌는데, 조선학교에선 요즘도 학생뿐 아니라 부모까지 단상에 올라가 개근상을 받는다. 그렇게 성실성을 몸에 배도록 한 게 오늘날 대세를 있게 한 원동력이다.”



● 화제는 브라질전 때 보인 ‘대세의 눈물’이다. 강인한 정신력과 터프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한데.



“그때 나는 관중석에 있었는데 대세가 우는 장면이 전광판 화면에 나왔다. 그 마음을 알기 때문에 내 눈에서도 눈물이 나왔다. 대세는 월드컵 무대에서 세계적 스타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기쁨에 울었다고 말했는데 꼭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라고 본다. 대세의 눈물은 재일동포들의 한과 아픔을 상징하는 눈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과 장벽을 이겨내고 프로선수가 되고 월드컵에까지 나갔으니 말이다. 그 짧은 순간 결코 순탄치 않았던 자신의 축구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고 한다.”



● 정 선수는 힘들 때마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겨냈다고 하던데 언제 가장 힘들어했나.



“대세의 가장 큰 방황은 공화국(북한)대표가 되고 난 뒤였다. 대표선수란 꿈을 이루기 위해 일로매진해 오다 정작 대표팀에 합류해서 경기를 하고 나더니 축구 스타일이나 수준 차이, 문화적 이질감과 열악한 여건 때문에 실망하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갈등도 있었던 것 같다. 말도 완벽하게 통하지 않고, 직접 유니폼을 빨아야 하는 여건까지 모든 게 익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낌새를 채고 신칸센을 타고 나고야에서 도쿄로 달려가 대세를 나무랐다. ‘네가 언제부터 유명해지고 언제부터 컸다고 그러느냐, 초심으로 돌아가 배전의 노력을 하라’고 타일렀더니 그 다음부터 대세가 달라졌다.”



● 어머니가 가장 강조한 것은.



“연습이다. 프로 입단 초반에 대세는 늘 벤치 신세였다. 조선대학 시절 잘했다고 해도 우물 안 개구리다. 조선대학은 도쿄의 대학팀 가운데서도 3부 리그에 속할 정도로 약체였으니 좋은 팀과 시합해 본 경험조차 별로 없었다. 또 그 무렵, 요코다 메구미 등 일본인 납치 문제로 반북 감정이 최고조에 이를 때여서 심리적인 동요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것을 이겨내려면 결국 연습밖에 없지 않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대세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은 연습을 얼마나 했느냐’고 묻고 확인한 게 프로 입단 이후 3년간 계속됐다. 대세가 언젠가 ‘나도 프로선수인데,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이지 솔직히 듣기 지겹다’고 반발할 정도였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대세는 실제로 피나게 연습을 했다. 일본인 구단 직원들로부터 ‘대세가 정말 지독하게 연습을 한다’는 말을 들을 땐 나도 눈물이 나왔다.”



● 민감한 얘기가 될지 모르지만 국적 문제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는 북한 국적(조선적)을 지키고 있는데, 아버지는 한국 국적이다. 정 선수의 가정을 분단의 상징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통일을 이룬 가정으로 봐야 할지 혼란스럽다. 결혼할 때 집안의 반대가 있었을 법도 한데.



“32년 전 중매로 대세 아버지를 만났는데 재일동포가 아닌 분은 이해하기 힘들지 모르나 우리 같은 부부가 많다.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고 한민족으로 산다면 국적은 상관하지 않는다.”



● 대세가 아버지를 따라 한국 국적인데도 북한 대표선수가 된 것은 조총련계인 조선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인데.



“아이들을 어느 학교에 보내느냐로 부부싸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남편은 일본인 학교에 보내자고 했지만 나는 조선학교를 양보할 수 없었다. 나는 결혼 전까지 조선학교 초등부 교사를 8년간 했다. 일본 학교를 다니면 아무리 귀화하지 않고 국적을 유지해도 결국은 (정신적·문화적으로) 일본 사람이 되고 만다는 신념에 변화가 없다. 울진이 고향인 친정 어머니는 17세 때 직공으로 일본에 건너왔는데, 1945년 해방 후 동포들이 일본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우리말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는 운동을 벌였을 때 히로시마에서 학교 짓는 일에 직접 노력 봉사를 했던 분이다. 유치원은 일본인 유치원에 보냈는데 그건 나중에 초등학교를 조선학교에 입학시킬 심사로 전략적 타협을 한 것이었다. 나중에 아이들이 학교 생활을 잘하는 것을 보고는 아버지도 이해를 해주었다.”



● 조선학교를 다니면 정치적으로 북한체제를 신봉하고 한국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갖게 되지 않나.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민족적 긍지와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는 것이다. 한국 국적의 부모들도 우리 말과 문화를 배우게 하기 위해 조선학교에 자녀들을 많이 보낸다.(민단계 학교는 일본 전국에 4곳 뿐이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 일본 학교에 가면 집단따돌림(이지메)을 당할 수 있지만 조선학교에는 그런 것 없이 당당하게 다닐 수 있지 않나. 한국에 대한 적대감 같은 것은 나부터 없다. TV를 켜면 한국 드라마만 본다. 한국을 세 차례 방문했는데 갈 때마다 역시 내 나라란 생각이 들고 지금도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다. 한국 인터넷 사이트를 보면 대세를 ‘빨갱이’라고 비난하는 댓글이 많은데 그런 것 없다. 대세는 그저 축구가 좋아 축구를 할 뿐이다.”



● 남아공에 갔을 때는 한국팀도 열심히 응원했다는데.



“한국과 아르헨티나 경기 때 북측 응원단도 함께했다. 정작 대세가 출전한 경기 때보다 더 비싼 표를 사서 들어갔다. 우리 앞줄에 한국팀 응원단이 앉았는데 우리를 보고 굉장히 고마워했다. 시합에 져서 아쉬웠지만 경기가 끝난 뒤 남북 응원단이 함께 꽹과리를 치고 춤을 추며 어울렸다. 그 순간 이념갈등 없이 한민족이 하나가 됐다.”



● 정 선수가 프로선수로 유명해진 뒤 학생 때와 달라지거나 한 점은 없나.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타고 다니는 차량은 중고차인데 한 번은 자기가 좋아하는 외제 자동차를 새 차로 사겠다고 했다. 다른 동년배 샐러리맨에 비하면 돈을 더 많이 받으니 자유롭게 쓰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축구에 전념할 때고 더 성공해서 사라며 말렸더니 받아들이더라. 자기 분수를 잊지 않는 아이다.”



● 정 선수는 취미가 다양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것 같다.



“피아노를 잘 친다. 운동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면 곤란하다고 생각해서 어릴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계속 가르쳤다. 내가 직접 가르칠 수도 있지만 그러면 불필요하게 꾸지람을 하게 될까 봐 다른 선생님을 붙여줬다. 그림도 곧잘 그린다. 그런데 요즘은 힙합 음악 같은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나는 그런 취향을 잘 이해 못하겠지만, 디스크자키 장비를 방에다 두고 취미 삼아 즐기고 직접 방송에 출연해 시범을 보인 적도 있다. 그런데 이번에 독일 이적을 앞두고 이삿짐 정리를 하는데 디스크자키 장비를 독일로 안 보내고 고향 집으로 보내왔기에 ‘아, 이번에 단단히 각오를 했구나’ 싶었다.”



● 한류 팬이란 얘긴데 누구를 좋아하나.



“욘사마(배용준)나 얼마 전 숨진 박용하도 좋긴 하지만, 나는 최민수씨가 가장 좋다. 터프한 역할을 많이 하는데, 그러고 보니 남편도 터프한 스타일이다. 하하.”






j 칵테일 >> 자이니치(在日·일본에서 재일동포를 통칭하는 약어) 축구



조선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누구나 광적인 축구 팬이다. 재학 시절 남학생은 거의 예외 없이 방과후 특별활동 시간에 축구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 학생들이 대부분 야구를 할 때 조선학교 학생들은 축구를 했다. 야구는 글러브 등 장비 값이 많이 들지만 축구는 공만 하나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이정금씨) 따라서 재일동포 선수들의 슈팅은 그들만이 갖는 한(恨)이 응결된 발길질이라 할 수 있다. "축구는 나의 정체성을 찾는 싸움이었다”고 재일동포 작가 신무광씨는 말한다.



한때 조선학교의 축구 실력은 일본 학교에 비해 압도적으로 셌다. "우리들이 일본 사람과 접하는 건 싸울 때와 축구 할 때뿐”이라는 재일동포 작가 가네시로 가즈키의 자전적 소설 ‘GO’의 한 구절처럼 재일동포 학생들에게 축구는 주먹다짐이나 패싸움이 아닌 합법적 방법으로 일본 학생과 싸워 이기는 방법이었다. 2007년까지 북한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김광호 등 걸출한 선수도 배출됐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부터 프로축구 J-리그가 창설되는 등 일본에서 축구가 유행하자 조선학교의 우위는 옛날 얘기가 되고 말았다. 또 조선학교가 일본 국내법상 정식 학교가 아니란 이유로 전국대회 출전의 기회도 한동안 봉쇄됐었다. 그러는 사이 축구에 재능이 있는 조선학교 학생들은 일본 대학으로 진학하는 관행이 굳어졌다. 정대세는 조선대학 졸업생으로 J-리그 1부 팀에 입단한 제1호 선수다.



정대세의 형 이세(28)씨도 축구선수다. 정이세 선수는 2008년 국내 내셔널리그 충주 험멜에서 골키퍼로 활약했다. 계약이 만료돼 지난 2월 일본으로 돌아가 J-리그 2부 구단인 FC 기후에서 연습생으로 뛰고 있다.










j 칵테일 >> 식민지·분단 아픔 담긴 가족사



정 선수의 성장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어머니 이정금씨. 뒤의 큰 그림은 결혼 전까지 조선학교 초등부 음악교사였던 어머니가 정 선수의 생일 선물로 주기 위해 사흘 동안 그린그림이다.
정 선수의 가족사에는 식민지와 분단을 거친 우리 민족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외할머니 김홍선(91)씨는 17세 때 돈 벌러 일본으로 가 방직공장 직공으로 일했다. 비슷한 처지의 동포 남성을 만나 결혼했으나 태평양전쟁 말기 공습의 희생자가 됐다. 1945년 해방된 뒤 재일동포들이 일본 각지에서 민족학교 건립 운동을 벌일 때 히로시마 조선학교를 세우는 데 앞장섰다.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배운 사람은 지식으로, 돈도 지식도 없으면 노력 봉사라도 해서 학교를 세운 게 조선학교의 시초”라고 이정금씨는 말했다. 이렇게 세워진 조선학교가 친북, 조총련 성향의 학교로 재편된 것은 훗날의 일이다.



이씨가 한때 조선학교 교사를 하고 정 선수 형제가 모두 조선학교를 다닌 배경은 할머니의 젊은 시절 행적과 무관치 않다. 김 할머니는 고령에도 손자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열혈 팬이다. 정 선수의 아버지는 한국, 어머니는 북한으로 한 가정 안에서도 국적이 분단돼 있다. 하지만 정 선수의 부모가 세 자녀를 두고 화목한 가정을 이룬 건 “분단을 넘어 통일을 이룬 것”이라고 가족들은 믿고 있다.



>> 북한 여권 지닌 정대세



정대세는 한국 국적이지만 한국 여권을 갖고 있지 않다. 여권뿐 아니라 주민등록증도, 주민번호도, 호적도 없다. 출생과 동시에 아버지의 국적을 따라 일본 관청에 한국 국적으로 자동 등록됐을 뿐이다. 적극적으로 한국 정부에 여권과 주민등록증을 신청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의사가 없다고 정대세는 밝혔다.



월드컵에서 북한 대표로 뛸 수 있었던 것은 북한 여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 정부가 정대세를 자국민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다. 정대세는 대학 시절 한 차례 북한 여권을 신청한 적이 있으나 당시엔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에겐 여권을 줄 수 없다’며 거부당했다. 그래서 외국인등록증 상의 한국 국적을 ‘조선적’으로 바꾸고자 했으나 일본 국내법상 불가능했다. 프로 진출 이후인 2007년 조총련 소속 체육인들이 적극적으로 북한 정부를 설득해 여권을 발급받고,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북한 대표 자격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일본 법률상으로 그는 한국 국적의 외국인이다. 때문에 해외 여행이나 원정을 나갈 때에는 일본 정부가 발행하는 ‘재입국 허가서’를 갖고 간다. 그게 없으면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하다.






<6일 이뤄진 정대세 선수와의 인터뷰 가운데 중앙일보 7일자에 미처 담지 못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정대세 “월드컵 뒤에 갔던 평양 … 김정일 위원장 환영 행사는 없었다”




● 원래 눈물이 많은 성격인가.



“그렇다. ‘겨울 연가’를 보면서도 울고, 동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면서 운 적도 있으니 말이다. 이번 브라질전에서 처음 운 게 아니라 중요한 시합에 나가면 꼭 식전 행사 때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이 나온다. 2008년 동아시아 선수권대회에서 일본전이 시작되기 전에도 울었는데 그건 일본을 꼭 이겨 보겠다는 오랜 소망이 마침내 실현될 순간에 왔기 때문이었다. 2005년 2월 독일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공화국(북한)과 일본이 같은 조가 되어 일본 사이타마에서 맞붙었는데 나는 당시 대학생으로 관중석에서 관람했다. 우리 팀이 잘 싸웠지만 2대1로 져서 분했다. 그때부터 반드시 내가 대표선수가 되어 일본을 꺾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브라질전에서 울 때는 짧은 순간이지만 축구인생을 되돌아보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난관이 참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어떤 난관들이 있었나.



“이제 많이 알려졌지만 대표선수가 되기 위해 국적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전에도 역경이 많았다. 조선고교를 졸업하고 축구에 뜻을 둔 사람들은 일본 대학에 진학한다. 왜냐하면 조선대학 축구팀은 도쿄 대학리그 가운데 2부도 아닌 3부 리그 소속의 약체여서 제대로 된 상대와 붙어볼 기회도 없고 따라서 웬만큼 잘해도 관심권 밖에 묻히고 말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어머님과 고교시절 은사의 뜻에 따라 조선대학에 진학했다. 은사님은 ‘일본 대학 가서 의자만 데우기보다는(후보선수 신세를 뜻함) 조선대학 가서 주전으로 뛰는 게 낫지 않으냐’고 해 그냥 따랐다. 내가 조선대학 출신으론 최초로 J리그 1부 구단에 입단했는데 이것부터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들 했다.”



● 북한 선수들과는 호흡이 잘 맞았나.



“지금이야 잘 맞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게 아니다. 일단 내가 우리말이 완벽하지 못해 의사소통이 100% 안 되니까 그런 점도 있었다. 또 문화적 차이도 있었다. 내가 휴대전화나 게임기, 휴대용 음향기기 등을 가져가면 전원이 돌려가며 구경하는 바람에 내 물건을 내가 쓰지 못한 것도 솔직히 잘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북한은 축구선수에겐 지원 환경이 좋지 않다. 유니폼 빨래도 선수가 직접 해야 하고, 유니폼도 치수가 꼭 맞는 게 잘 없다. 심리적인 벽이 좁혀지지 않아 다른 선수들을 멀리하기도 했는데 그러다 보니 내게 좋은 연락(패스)이 안 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머니의 충고를 듣고 느끼는 바가 있어 그 다음부터는 내가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랬더니 나한테 좋은 연락이 오더라. 경기장 밖에서 친해져야 경기장 안에서도 호흡이 잘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 월드컵 때 써먹으려고 포르투갈어를 배웠다는데 뭔가 한 곳에 꽂히면 해내고야 마는 집념이 대단한 것 같다.



“월드컵 때도 필요했지만, 포르투갈어 또한 내가 소속팀에서 축구를 잘하기 위한 점도 있다. 나 이외에 가와사키의 주 공격수 3명은 모두 브라질 선수다. 다시 말해 내가 그들과 완벽하게 의사소통을 해야 경기가 잘되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포르투갈어를 배워가며 친해지려고 한 것이다.”



● 꿈에 그리던 월드컵에 나가본 소감은 어떤가.



“선수로서 그 이상의 영광이 있겠는가. 하지만 너무 긴장한 나머지 골을 못 넣은 것은 아쉽다. 부부젤라 소리 때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황에다 그런 대무대에는 난생 처음 서보니 덩달아 흥분과 긴장이 고조되어서 냉정함을 잃었던 것 같다. 그래도 세계적인 스타 선수들은 침착함을 잃지 않고 자기 페이스를 유지해서 골을 넣지 않느냐. 그런 것이 진짜 선수다.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 한국 선수 가운데 누구를 가장 좋아하나.



“단연 박지성이다. 아시아 선수 가운데 최고로 존경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해 박지성 선수와 함께 플레이하는 것이 꿈이다. 물론 내 실력이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다.”



● 독일 진출은 어떻게 결정했나.



“2부 리그이긴 하지만 영국팀 한 곳에서 이적 제의가 있었다. 하지만 북한 여권을 갖고서는 (정치적 이유로) 영국에 진출하기가 까다롭다. 반면 독일은 그런 면에서 덜 엄격했다. 18일 독일로 떠난다. 이번 월드컵에서 보듯 독일 축구가 예전보다 더 강해졌고, 앞으로 세계 축구의 중심이 독일로 이동할 가능성도 보이고 해서 오히려 잘된 것 같다.”



● 월드컵이 끝난 뒤 평양을 거쳐 왔는데, 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나.



“김 위원장이라든가 당·정부 고위직 간부 주최의 환영행사를 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호텔에서 주로 생활하면서 축구협회 분들의 환영을 받고 왔다.”



● 일부 보도에서 성적이 안 좋아 질책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열심히 했다며 따뜻하게 대접해 주었다.”



● 북한 축구가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 같나.



“우선 경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수한 자질의 선수가 해외에 진출해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는데 나라 사정상 그게 잘 안 되니 안타깝다. 선수들은 개인적으로 해외 진출에 관심이 많다. 해외 나가면 월급을 많이 받느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북측 선수들은 정신력과 투지, 순간 동작의 빠르기만 따지면 아주 우수하다. 전술 면에서 부족한 것을 더 개발하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얘기를 다른 동료들에게도 했다.”



● 미혼인데 한국 연예인 가운데 이상형을 찾는다면.



“김태희씨가 좋다. 또 내가 음악을 좋아해서 그런지 원더걸스나 소녀시대도 다 좋다. 기회 있으면 한국에 경기가 아니라 놀러 가서 젊은이들과 어울려 보고 싶다.”






정대세 약력



1984년 3월 2일 일본 아이치 현 나고야 출생

한국 국적 취득(아버지 정길부씨가 한국 국적, 어머니 이정금씨는 북한 국적)

정씨의 본적은 경북 의성

아이치 조선초급학교·도슌(東春) 조선초중급학교

아이치 조선중고급학교, 도쿄 조선대

2006년 일본 J-리그 가와사키 프론탈레 입단

2007년 북한 국가대표팀 선발

2010년 6월 남아공 월드컵 출전

2010년 7월 독일 분데스리가 VfL 보훔으로 이적

키 1m81㎝, 몸무게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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