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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판문점의 공산주의자들 (125) 가난한 나라, 가난한 군인

회담은 별로 진척이 없었다. 늘 같은 분위기였다. 도쿄에 다녀오라는 명령에 따라 회담 대표 5인은 1951년 8월 중순의 어느 날 김포에서 미군 수송기를 타고 떠났다.

나는 사실 왜 우리가 도쿄에 가는지 잘 몰랐다. 그저 “갔다 오라”는 말에 대표 일행과 함께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별다른 준비를 하지 못했다. 카키색 보통 복장에 작업모를 쓴 차림이었다.

도착 직후 우리는 매슈 리지웨이 사령관과 오찬을 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와 오클라호마 주지사가 함께 있었다. 그들은 주 방위군의 사령관을 겸하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의 주 방위군은 제40사단, 오클라호마 방위군은 제45사단이었다. 그 사단 병력을 일본에서 훈련시켜 한국에 보냈는데, 주지사 두 명은 그 과정을 지켜보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는 것이다.

6·25전쟁에 참전 중이던 미 공군의 제럴드 퍼거슨 상병이 휴가차 도착한 일본 후쿠오카의 브래디 공군기지에서 ‘100만 번째 유엔군 휴가장병’에 뽑혀 행운의 열쇠를 비롯한 선물을 받고 있다. 워싱턴주 키와 출신인 퍼거슨은 당시 제3폭격비행단 소속으로 B-26 폭격기 기총사수로 근무하고 있었다. [미 국립 문서기록보관청]
이번의 도쿄행은 휴전회담 대표들에게는 일종의 휴가였다. 특별한 안건 없이 대표들을 도쿄에서 잠시 쉬게 하려는 리지웨이 사령관의 배려였던 것이다. 따라서 리지웨이와 오찬을 함께하며 캘리포니아·오클라호마 주지사에게 한국전선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외에는 다른 공식 일정이 없었다.

나머지 일정은 매우 자유로웠다. 나를 제외한 회담 대표들은 모두 가족이 도쿄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시간을 내서 가족들과 만나면서 모처럼의 휴식을 즐겼다. 나도 별일이 없으면 도쿄 시내를 돌아다녔다. 도쿄뿐 아니라 그 외곽까지 나가서 우리를 36년 동안 강점해 통치했던 일본이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가를 살폈다.

일본은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미군과 태평양전쟁을 벌이면서 잿더미로 변했던 도쿄 시내는 곳곳에서 건설 붐이 불어닥치면서 활기찬 모습을 띠고 있었다. 공장들도 전후 복구 과정을 거쳐 뭔가를 활기차게 쏟아내는 분위기였다. 패전국답지 않게 사람들의 표정도 무척 밝아 보였다.

나는 그런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비애에 빠지곤 했다. 그들은 한국에서 벌어진 잔혹한 전쟁 덕에 다시 일어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전쟁이 발생하고 미군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미군과 국군에게 필요한 모든 군수품(軍需品)은 일본에서 만들어져 한국의 전선으로 보내지고 있었다. 전후의 잿더미에 빠져 있던 일본이 그 전쟁 특수(特需)를 모두 받아 쥔 셈이었다.

‘일본이 한국을 36년 점령했고, 그 뒤에는 다시 한국에서의 전쟁 덕분에 경제성장까지 이루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도쿄 시내를 여기저기 거닐 때마다 드는 것이었다. 뭐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의 서운함과 아쉬움이 가슴을 저몄다. 언제 우리는 일어서서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가 될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착잡해져 왔다.

그때의 내 심정은 절실했다. 우리나라의 형편이 말이 아니어서 더욱 그랬다. 휴전회담 한국 측 대표로서 도쿄에 온 내 경우가 그를 잘 설명해 주고 있었다. 해외 출장이라면 출장이랄 수 있는 것이었는데, 당시 내 수중에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내가 묵는 곳은 유엔군사령부가 지정해 준 도쿄 시내의 제국호텔이었다. 하루 숙박비가 5달러였다. 먹는 일과 움직이고 활동하는 데 써야 할 경비가 내겐 전혀 없었다. 미군 측에서는 나를 데리고만 왔지 경비를 따로 지급해 주지는 않았다. 멋모르고 나선 해외 여행길에서 자칫 망신만 당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 없어 숙박비와 기타 경비를 못 내 미군들에게 신세를 진다면 내 망신도 망신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나라 망신도 감수해야 할 상황이었다. 할 수 없었다. 한국대표부를 찾아갔다. 도쿄 시내 긴자(銀座)의 미쓰코시(三越) 백화점 앞 시계점 건물에 대표부가 있었다. 일본과 정식 수교를 맺지 않은 상태라서 대사관 대신 대표부가 있던 때였다.

6·25전쟁 초기에 국방부 장관을 맡아 전선을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눈물을 자주 뿌려 ‘낙루(落淚) 장관’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신성모 전 장관이 대표였다. 내가 문을 들어서자 그는 “야, 정말 반갑다”면서 나를 얼싸안았다. 이런저런 인사 끝에 내가 어려운 얘기를 꺼냈다.

“좀 곤란한 상황이 생겼습니다. 돈 한 푼도 없이 왔는데, 경비를 좀 변통해 주실 수 없습니까”라면서 내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신 대사(나는 그때 그를 ‘대사’로 불렀다)는 “진작 찾아와서 말을 하지 그랬느냐”면서 선뜻 10만 엔을 꺼내 내게 건네줬다.

당시 일본 근로자 평균 월급이 1500엔이었으니 상당한 금액이었다. 신 대사의 배려로 나는 경비 걱정 없이 일본 시내를 쏘다닐 수 있었다. 나중에 쓰다 남은 절반 이상의 돈은 신 대사에게 다시 반납했다. 그는 “더 쓰지, 왜 갖고 왔느냐”고 했다.

일본의 국민 가수 미소라 히바리(1937~89)
아무튼 신 대사의 배려로 나는 미군 대표들과 도쿄 시내를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당시에는 일본의 국민가수라고 했던 미소라 히바리의 인기가 상한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화려한 도심이었던 긴자 거리 곳곳에 그녀의 광고판이 붙어 있었다. 사람들과 어울려 극장 비슷한 곳에 들어가 프랑스의 캉캉춤 공연도 볼 수 있었다. 생선초밥과 생선 어묵도 길거리에서 사 먹었다. 전쟁 중에 맞은 휴식치고는 호사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도쿄 시내를 배회하면서 마음은 개운치 않았다. 돈 없는 나라의 돈 없는 군인. 주머니에서 신 대사가 건네준 돈을 조심스럽게 꺼내 지불할 때마다 드는 감정은 처량(凄凉)함이었다. 나라가 가난한 데서 오는 위축감(萎縮感)이었다. 우리는 언제 일어서서 자랑스럽고 부강(富强)한 나라가 될 것인가. 도쿄 시내 복판에서 내 머리를 맴돌며 줄곧 떠나지 않던 생각이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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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