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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 야만성 이긴 예술혼 ... 농촌 필부도 공감하는 작품 세계 추구



▲‘제비 한 쌍’(1981), 화선지 수묵채색,70*140㎝,홍콩예술관 소장 우관중이 일생의 대표작으로 꼽던 작품

obituary 6월 25일 91세로 타계한 중국 현대미술의 대부 우관중(吳冠中)



2007년 1월, 그는 내가 만나본 최고령의 화가였다. ‘우관중 2006년 신작 전시회’라는 ‘비상식적’인 팻말 앞에 선 그를 보기 전까지 나는 그가 인생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지난 역사의 한 페이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섣부른 일축이었다. 아슬아슬한 몸을 꼿꼿이 세우고, 바람 든 목소리를 단호한 호흡으로 이어가던 그 연설자는 근 한 세기에 달하는 기억을 지닌 이에게 역사란 무엇인지, 달랑 30년의 봇짐을 짊어진 내게 영화 속 타임머신보다 아찔한 충격을 새기고 있었다. 취약하기 그지없는 육신을 거뜬히 지탱해내던 그 확고한 눈빛은 90년의 세월 동안 그가 무엇을 보았고, 보고 있으며, 보길 원하는지 한순간에 응축하고 있었고, 역사란 이렇게도 지독한 열정과 절절한 생명력으로 이어져 사실상 과거, 현재, 미래 같은 말들이 얼마나 싱거운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지난 6월 25일 자정을 몇 분 앞둔 시각, 중국 미술계의 거성은 마침내 찬란한 빛을 거두었다. 중국의 모든 매체가 연일 사망 소식과 관련 뉴스를 보도하고, 포털사이트에는 전용 링크가 개설돼 그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가운데 ‘우관중이 죽었으니, 이 나라에 더 이상 대사(大師)가 존재하는가?’라는 공개적인 탄식은 이미 그의 생전 궁색해지기 시작한 어떤 이들을 더욱 불편하게 하고 있다. 그의 작품을 다수 소장한 중국미술관은 즉시 추모전 준비에 돌입했고, 그 외 국내외 수많은 미술관과 미술계 인사들이 분분히 애도를 표하고 있지만, 마지막까지 중국 제도권 미술의 부패와 문제를 비판하던 그는 최후의 길까지도 한 치의 긴장을 풀지 않았다. 전 세계로부터 추앙받던 거장은 장례식도, 묘비도 거절한 채 바다에 뿌려져 이 역사를 계속 맴돌기로 했다.



2007년 1월, 그는 내가 만나본 최고령의 화가였다. ‘우관중 2006년 신작 전시회’라는 ‘비상식적’인 팻말 앞에 선 그를 보기 전까지 나는 그가 인생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지난 역사의 한 페이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섣부른 일축이었다. 아슬아슬한 몸을 꼿꼿이 세우고, 바람 든 목소리를 단호한 호흡으로 이어가던 그 연설자는 근 한 세기에 달하는 기억을 지닌 이에게 역사란 무엇인지, 달랑 30년의 봇짐을 짊어진 내게 영화 속 타임머신보다 아찔한 충격을 새기고 있었다. 취약하기 그지없는 육신을 거뜬히 지탱해내던 그 확고한 눈빛은 90년의 세월 동안 그가 무엇을 보았고, 보고 있으며, 보길 원하는지 한순간에 응축하고 있었고, 역사란 이렇게도 지독한 열정과 절절한 생명력으로 이어져 사실상 과거, 현재, 미래 같은 말들이 얼마나 싱거운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지난 6월 25일 자정을 몇 분 앞둔 시각, 중국 미술계의 거성은 마침내 찬란한 빛을 거두었다. 중국의 모든 매체가 연일 사망 소식과 관련 뉴스를 보도하고, 포털사이트에는 전용 링크가 개설돼 그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가운데 ‘우관중이 죽었으니, 이 나라에 더 이상 대사(大師)가 존재하는가?’라는 공개적인 탄식은 이미 그의 생전 궁색해지기 시작한 어떤 이들을 더욱 불편하게 하고 있다. 그의 작품을 다수 소장한 중국미술관은 즉시 추모전 준비에 돌입했고, 그 외 국내외 수많은 미술관과 미술계 인사들이 분분히 애도를 표하고 있지만, 마지막까지 중국 제도권 미술의 부패와 문제를 비판하던 그는 최후의 길까지도 한 치의 긴장을 풀지 않았다. 전 세계로부터 추앙받던 거장은 장례식도, 묘비도 거절한 채 바다에 뿌려져 이 역사를 계속 맴돌기로 했다.





▲2‘봄은 어디로 가는지’(1999),마포에 유화,100*148㎝,상하이미술관 소장



그러나 돌아온 고국에서 대면한 현실은 그의 기대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귀국 직후 교수로 발탁된 우관중은 유럽의 최신 미술을 후학들에게 소개하려 했지만, 이미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조국은 그의 예술을 선뜻 환영하지 않았다. 오히려 낯선 현실들은 그의 쉽지 않았던 결심과 부푼 꿈들을 잔혹하게 배신했다. 모든 예술은 당의 지도 방침과 창작 강령에 복종해야 했고, 사회주의 사실주의 외에 어떤 양식과 이념도 허용되지 않았다. 우관중의 그림은 ‘공농병 계급을 추하게 묘사한’ 형식주의 예술로 호도되었다. 우관중은 당과 제도권의 간섭 혹은 비판을 피하기 위해 인물화 대신 풍경화를 선택했지만, 학교에서는 여전히 ‘독소’ ‘유해한 교원’ 등으로 분류돼 활동에 제한을 받았다.



그는 제도권에서 가장 빈번히 경질되는 교수 중 하나였고, 그 때문에 가장 시간 많은 교수이기도 했다. 이 모든 상황을 견뎌내는 유일한 방법은 극한의 창작활동으로 자신을 몰고가는 것이었다. 그는 기회만 주어지면 전국 각지로 돌며 자신의 예술 탐구를 지속했다. 열악한 숙식, 험난한 환경을 감내하면서도 작품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식사조차 거르던 스케치 여행은 일종의 고행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는 이렇게 간신히 혹은 필사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예술 신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절망은 더욱 짙어만 갔다. 사청(四淸)운동과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후에는 작품 훼멸도 모자라 아예 창작 금지령이 내려졌다. 삶의 유일한 수단마저 박탈당하고, 병든 몸으로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자살 충동을 느낄 만큼 심한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



이미 극한에 달한 오기인지 곧 발광할 히스테리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차라리 ‘그림으로 죽으리라’ 절규하며 또다시 붓을 집어들었다. 파리에 남은 친구들이 자유로운 무대에서 일가를 이루는 동안, 우관중이 이렇게 견뎌낸 시간은 어느덧 30년의 세월이 되었다.



1978년 마오쩌둥 집권 시대가 막을 내리고, 우관중도 기나긴 암흑의 세월에서 벗어났다. 이미 화단의 원로가 된 그는 기나긴 겨울을 이겨낸 기름진 춘토(春土)가 되었다. 웬만한 이론가의 논리력과 필력을 넘어서는 그는 ‘회화의 형식미’ ‘내용이 형식을 결정한다?’ ‘추상미에 관하여’ 등의 글을 통해 제도권의 창작 이념에 공식적으로 도전했고, 자신의 복권된 지위를 통해 젊은이들의 창작과 연구를 이끌고 지원했다. 35년에 달하는 교직 기간 중 그는 단 한 명의 직계 제자조차 둘 수 없었지만, 저우춘야(周春芽), 황루이(黃銳), 마오쉬휘(毛旭輝), 장샤오강(張曉剛) 등 현대미술의 수많은 주량은 자신의 토대로 그를 지목한다.



우관중의 작품은 현대적 감각을 추구하되 농촌의 필부까지 공감할 수 있는 예술을 추구했고, 추상과 구상이 절묘하게 결합된 양식으로 유화와 중국화 양쪽에서 모두 일가를 이뤘다. 30년 역경의 세월을 흔적도 없이 무색하게 만든 그의 뜨거운 창작열은 국내를 넘어 유럽, 미국, 아시아의 수많은 미술관에까지 전달되었다. 젊은 날 그에게 모더니즘을 알려주었던 파리시는 문화예술 최고훈장으로 다시 돌아온 그를 포옹했다. 평소 “<837C>”(의미:씀바귀, 독, 불꽃 같은 맹렬함과 왕성함)라는 서명을 즐겨 쓰던 그는 안거를 자처할 만한 최후 말년까지도 제도권을 향한 날 선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조국을 통렬히 비판하되 동시에 필생의 애정을 다했던 그의 예술과 인생에 대해 사람들이 보내는 지지와 성원 역시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1990년대 중국 현대미술 시장이 채 형성되기도 이전, 그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위작 시비를 가리는 재판에 참가해야 했다. 현재까지도 2000년 이래 옥션 거래 총액 집계가 17.8억 위안(약 3200억원)에 이를 만큼 그의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그는 대부분의 작품을 미술관에 기증하고, 다섯 평방미터의 작은 방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에게 있어 역사란 위엄도, 명예도, 권력도 아닌 다만 그렇게 불꽃처럼 뜨겁고, 왕성하고, 절절한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이보연 미술평론가 haiyue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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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서울대 미대에서 공부했고 현재 중국 칭화대에서 논문을 쓰는 중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은 경계로 삼기보다 핑계로 삼는 게 인생에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2008년 『이슈, 중국현대미술』(시공사)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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