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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72) 마오쩌둥의 공공외교



▲에드거 스노는 중국의 문화인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1938년 봄, 홍콩에서 열린 만화가 딩충(오른쪽 둘째)의 항일전쟁 기금 마련 전시회에 참석한 스노(왼쪽 둘째). 김명호 제공

에드거 스노 ‘중국의 붉은 별’ 홍군에 날개 달다



1936년 10월 중순, 베이핑(北平)으로 돌아온 에드거 스노는 미국 영사관 강당에서 서북기행(西北紀行)을 발표했다. 베이징대·옌징대·칭화대 학생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인산인해를 이뤘다. 스노는 일본과의 전쟁을 주장하던 12·9 학생시위의 절대적인 지지자였다. 참석자들은 스노가 16㎜ 필름에 담아 온 마오쩌둥과 주더, 펑더화이, 청년장군 린뱌오, 테러리스트 저우언라이 등 현상수배자들과 홍군의 진면목을 보고 열광했다. 홍군을 비적으로 몰아붙이던 국민당의 선전에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2개월 후 시안사변이 발생했다. 중국의 2인자 장쉐량이 최고지도자 장제스를 감금해 국공합작과 항일전쟁을 요구한 기상천외한 사건이었다. 장제스는 장쉐량의 요청을 수락했고 마오쩌둥과 홍군은 기사회생했다. 마오는 바오안(保安)을 떠나 옌안(延安)에 정착했다. 홍군은 정규군 대접을 받았다. 이제 옌안은 현대판 양산박이 아니었다. 당당한 항일 근거지였다.



이듬해 여름(7월 7일) 중·일 양국이 전면전에 돌입한 직후 스노는 런던에서 『Red Star Over China(중국의 붉은 별)』를 출간했다. 상하이의 공산당 비밀당원들은 발 빠르게 중국어판을 만들어 시중에 내놓았다. 똑같은 내용이라도 고사 직전의 공산당이 “역사의 평가를 받겠다”며 만든 홍보물이었다면 불쏘시개감으로나 딱 알맞을 종이 뭉치였지만 이건 경우가 틀렸다. 정확하고 객관적인 보도로 명성이 자자한 미국 기자가 그것도 제 발로 홍군의 근거지를 찾아가 4개월간 현장을 누볐다니 내용에 거짓이 있을 리 없었다.



반응은 해외에서 먼저 왔다.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캐나다 의사 노먼 베순을 포함한 외국의 의사와 기자, 작가들이 옌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인도에서는 중국 의료지원단을 구성했고 미국 내 화교들은 성금을 모아 옌안에 ‘로스앤젤레스 유아원’을 설립했다. 한결같이 스노의 책을 읽고 실상을 알았다는 말을 한마디씩 했지만 총연출자가 마오쩌둥이라는 사실은 알 턱들이 없었다.



1936년 7월 마오쩌둥의 권유로 바오안 외곽의 홍군 근거지 취재에 나선 에드거 스노(오른쪽). 당시 서북 지역의 이동 수단은 말이었다.




국내는 더 요란했다. 이상을 추구하는 청소년들과 정치와 도덕이 일원화된 사회가 가능하다고 믿는 문화인들은 옌안에 가기 위해 시안행 열차를 탔다. 전국의 대학생 4만2922명 중 1만여 명도 캠퍼스에서 자취를 감췄다. 항일 전쟁 기간 약 4만 명의 지식인이 붉은 도시에 바글바글했다.



아편·술·도박·여자 외에는 관심이 없는 시궁창 같은 남편들을 바라보며 한숨만 쉬던 여인들과 대도시로 나왔다가 온갖 꼴불견은 다 구경한 여류 연예인 중에도 장칭(江靑)처럼 결단력과 추진력을 겸비한 사람들이 많았다. 계급·매춘·불량배, 툭하면 눈 부릅뜨고 잘난 척이나 해대는 정객과 공직자들이 없다는 항일성지(抗日聖地) 옌안은 낙원이었다. 스노의 책에 그렇게 써 있었다.



팔로군(八路軍)으로 개편된 홍군의 시안 연락사무소는 하루 평균 180명씩을 옌안으로 인솔했다. 남녀 할 것 없이 녹색 군복에 집에서 들고 나온 물건들을 꿰차고 행군하는 이들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정치범이나 사상범으로 체포되거나 수배된 경험이 있는 반역형 지식인과 입 한 번 벙긋한 죄로 죽도록 얻어맞고 나온 불평객들은 끝까지 잘 버텼지만 남의 돈 떼어먹거나 형사범으로 도망 다니다 옌안을 피난처로 택한 사람들은 오래 붙어 있지 못했다.



최근 공직에서 은퇴한 전직 관료 몇 명이 올해를 중국 공공외교의 원년으로 선포하자 스노와 함께 바오안에 갔던 조지 하템의 아들이 “74년 전 마오가 바오안의 토굴에서 스노와 하템을 처음 만난 1936년 7월 11일 오후 9시가 중국 공공 외교의 기점”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틀린 주장이 아니다. 『중국의 붉은 별』은 대전략가 마오쩌둥이 자신과 홍군을 중국과 전 세계에 선전하기 위한 공공외교의 산물이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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